[현장르포] ‘장닭을 꿈꾸는 병아리’ 한국 여자수구, 아파서 더 당당했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9년 7월 15일 05시 30분


세계 수준과 격차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그들에게도,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위대한 도전이었다. 여자수구대표팀이 14일 광주 남부대 수구경기장에서 열린 헝가리와 경기에서 0-64로 대패했다. 경영선수들로 급조된 현실을 고려하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모습만으로도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사진제공|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세계 수준과 격차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그들에게도,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위대한 도전이었다. 여자수구대표팀이 14일 광주 남부대 수구경기장에서 열린 헝가리와 경기에서 0-64로 대패했다. 경영선수들로 급조된 현실을 고려하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모습만으로도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사진제공|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1954년 6월 18일(한국시간) 취리히에서 펼쳐진 1954스위스월드컵 조별리그 2조 1차전. 김용식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국가대표팀은 당대 최고의 축구영웅 페렌츠 푸스카스가 두 골을 뽑은 헝가리에 0-9로 대패했다. 당시 한국의 골문을 지킨 골키퍼 홍덕영 옹은 수많은 슛을 막고 또 막았으나 압도적인 기량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다. 결국 한국은 제네바로 장소를 옮겨 열린 터키와 2차전에서도 0-7로 패배, 2전 전패로 첫 월드컵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다. 시작이 없으면 영광도 없는 법. 그 때 고통이 초석이 돼 아시아를 호령하고, 2018러시아월드컵에서 ‘전차군단’ 독일도 때려잡는 지금의 대한민국 축구가 탄생할 수 있었다.

12일 개막한 2019 국제수영연맹(FINA)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도 누군가의 출발이 있었다. 여자수구다. 세계선수권은 1986년, 하계올림픽은 2000시드니올림픽을 기점으로 정식 종목에 채택된 ‘수중 핸드볼’은 북미와 유럽에서는 큰 인기를 끄는 종목이지만 국내에서는 낯설다.

그나마 남자수구는 1986년 서울, 1990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은메달, 동메달을 획득했으나 여자수구대표팀은 사상 처음 결성됐다. 물론 치열한 예선 과정이 필요하나 우린 개최국 자격으로 출전권을 얻었다.

사실상 뿌리가 없다보니 5월 26일 선발전을 통해 발탁된 13명은 대부분이 경영선수로 활동했다. 수구 공을 잡아본 것도 이제 두 달이다. 헤엄치며 공을 주고받는 것이 아직 낯설고 위치 선정도 쉽지 않았으나 당당하게 도전에 임했다.

14일 광주 남부대 수구경기장. B조에 속한 한국의 1차전 상대는 헝가리였다. 수구가 축구 이상의 위상을 자랑한다. 여자부는 2012년 런던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4위, 2년 전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에서 5위에 올랐다. 급조돼 연습경기도 5~6회에 그친 우리대표팀과는 차이가 있었다. 예상스코어를 0-100으로 보는 시선까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태극낭자들은 대패했다. 8분씩 4쿼터 경기가 끝난 뒤 전광판에는 0-64가 새겨져 있었다. 71개의 슛이 날아왔고 그 중 7개만 골대를 벗어났다. 1쿼터 12초 만에 첫 실점한 한국은 22분11초를 헤엄친 송예서(18·서울체고)가 1쿼터 4분50여초 만에야 첫 슛을 시도하는 등 3개의 슛을 남겼다.

애국가가 울린 역사의 현장에서 환한 미소를 짓던 어린 선수들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짙은 피로가 솟아났다. 볼 키핑에 실패해 공격제한시간을 넘기기 일쑤였고, 어렵게 공을 잡아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패스를 하며 기회를 허무하게 날렸다. 몸싸움 역시 크게 밀렸다. 상대의 영리한 멱살잡이, 허벅지 차기에 몸 곳곳에 멍이 생겼고, 10cm 이상 머리 높이 두 팔을 쭉 뻗어오면 금세 물속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포기하지 않았다. “앞에서 막아줘” “왼쪽에서 뒤를 방어해야지” 코치와 동료들의 애절한 외침, “대~한민국”의 함성에 기운을 얻어 버티고 버텨 100실점 대신 64실점으로 묶었다.

경기 후에는 울지 않았다. 서로가 “잘했다”고 격려하며 눈물 대신 희망을 노래했다. “첫 슛을 더 강하게 때렸어야 했다”던 송예서는 “영상으로나 접한 헝가리와 싸웠다. 그 분들의 구력은 10년 이상이다. 우린 갓 깨어난 병아리 팀이다. 아직 대회가 남았다.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훈련 중 코뼈가 부러지고 팔과 손가락을 다친 골키퍼 오희지(23·전남수영연맹)도 “해볼 만 했다.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테이핑도 일부러 안 했다. 언니가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끝까지 잘 싸우겠다”며 단단한 의지를 전했다.

광주|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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