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동아/7월 8일] 박세리, 그녀의 발은 예뻤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8일 0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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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발’은 참 예뻤다. 새까맣게 탄 종아리와 대비돼 더욱 희게 빛났던 그 발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국민에게 희망의 상징이 됐다.

그 발 주인공은 박세리(40)였다. 무대는 1998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US여자오픈이 열린 미국 위스콘신주 블랙울프런 골프장. 당시 스물 한 살의 박세리는 전날 열린 4라운드까지 동갑내기 제니 추아시리폰(미국)과 나란히 6오버파 공동 선두로 경기를 마쳤고, 대회는 연장 라운드로 이어졌다.

7월 7일 열린 연장전도 최종 18홀까지 두 선수는 동타였다. 18번홀(파4). 박세리가 티샷한 공은 왼쪽으로 감기면서 워터 해저드(연못) 바로 옆 경사면 러프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오른손잡이 박세리로서는 정상적인 스탠스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는 ‘언플레이어블(unplayable)’을 선언하고 1벌타를 받는 게 상식.

하지만 박세리는 양말을 벗고 연못으로 들어갔다. 연못 안에서 친 공은 페어웨이에 안착했고, 박세리는 이번에도 추아시리폰과 함께 18번홀을 보기로 마쳤다.

이제 누구든 한 홀만 앞서면 우승하는 ‘서든 데스’에 돌입했다. 승부가 갈린 건 92번째로 맞은 11번 홀(파4). 둘 모두 투 온에 성공한 뒤 추아리시폰이 먼저 퍼팅한 공이 홀 왼쪽으로 비켜가면서 60㎝를 지나쳤다. TV 중계를 지켜보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박세리가 홀컵 5m 거리에서 친 공은 홀 컵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박세리가 이날만 5시간이 걸린 혈전을 끝내는 순간이었다.

같은 해 5월에 열린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에서도 우승했던 박세리는 이날 우승으로 LPGA 역사상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를 2연패한 신인 선수가 됐다. 그는 펑펑 울면서도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당시 현지 중계진은 “이제 박세리의 방에는 우승 트로피를 쌓아둘 선반이 필요할 것”이라고 평했다.

박세리가 남긴 발자취는 LPGA에서 따낸 우승 트로피 25개 그 이상이었다. 그가 양말을 벗는 장면은 가수 양희은 씨의 노래 ‘상록수’와 어우러져 잊을 수 없는 공익광고가 됐다. 당시 박세리는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서 뛰던 ‘코리안 특급’ 박찬호(44)와 함께 한국 국민에게 따뜻한 위안을 주는 존재였다.

1998년 7월 7일 박세리의 그 흰 발은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상록수’)”라고 희망을 노래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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