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우스\' 안정환 선수(사진)의 반항아 매력은 스프레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얼마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출정식이 있었다. 아직은 면면을 잘 모르겠는 선수들의 등장 화면을 무심히 바라보던 나에게 갑자기 낯익은 이름이 들려왔다. 안. 정. 환. 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의 영웅이었다.
2002년에도 그랬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 이들은 그저 '대표팀 선수들'에 불과했다. 히딩크 역시 외국인이라는 것만 확실할 뿐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은 '그냥 감독'이었다. 그러나 한 달 후, 월드컵 4강 진출의 신화를 이룬 그들은 국민적인 영웅으로 변신했다. 이영표, 박지성, 안정환, 홍명보, 황선홍, 그리고 어린 차두리까지…. 불과 한 달 만에 그들을 모르는 한국인은 간첩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됐다. ▶ '테리우스' 안정환과의 광고 촬영 에피소드
남아공 월드컵 출정식은 2002년 안정환 선수와의 광고 촬영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했다. 월드컵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던 한일월드컵 직후, 필자는 안 선수와 광고 촬영을 진행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그를 위해 프랑스 현지 화면은 단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 스토리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전 촬영팀이 파리로 향했다.
감독과 촬영감독을 제외한 모든 스태프는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이 경제적일 것이라는 판단하에 파리의 유명 헤어 스타일리스트도 섭외했다. 그리고 촬영일을 하루 앞두고 드디어 우리는 파리에 도착했다. 촬영장에 등장한 잘 생긴 안 선수는 볕에 그을린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를 현지 헤어디자이너에게 안내한 후 잠시 클라이언트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시 안 선수가 모습을 나타냈다.
아.뿔.사. 프랑스 현지 스태프의 '작품'은 한국인 정서에 맞는 헤어스타일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단정한 5대 5 가르마, 곱게 빗어 끝을 말아 올린 웨이브 머리는 20세기 초 프랑스 영화에 등장하는 느끼한 신사의 모습이었다. 안정환 본인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통역을 거쳐 힘들게 우리가 원하는 스타일을 전했다. 그것도 수 십 차례 반복해서. 헤어스타일 보정이 지루하게 이어졌지만 어떻게 해도 우리가 원하는 스타일이 나오지 않았다. 헤어디자이너는 오히려 우리에게 '가이드라인대로 했을 뿐인데 어떻게 하라는 거냐'며 짜증을 냈다.
이때 안정환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복도 쪽으로 나가 버렸다. '화가 났으면 어쩌지?' 조바심이 났다.
잠시 후, 젖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그가 돌아왔다. 헤어스프레이 범벅으로 엉망이 된 머리를 감고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는 드라이어로 휙휙 머리를 털고 말리더니, 스포츠 선수다운 순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더 낫죠?"
그랬다. 그의 반항하는 테리우스적 매력은 스프레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운동장에서는 땀에 의해 연출되었듯, 감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흔들 때 발현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젖은 머리로 촬영은 무난히 진행됐다.
이후 그와 서너 번 촬영할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그 때마다 즐거웠다. 운동선수지만 섬세하게 발달한 '고운' 근육, 터프한 말투, 순진한 표정, 그리고 연기 열정까지…. 김재원, 현빈과 함께 한 촬영에서도 외모에서나 연기력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포스를 발휘했다. 당시 그가 광고하는 제품들은 모조리 히트했다. 그러나 스포츠 선수 모델의 장점은 여기까지다.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김연아가 붉은 악마로 변신해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의 선전을 바라는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제공 홈플러스
▶ 스포츠선수, 광고계 '빅모델' 드문 까닭은
2002년의 월드컵 스타도,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스타도 최근의 광고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역대 월드컵 스타들이 함께 등장하는 특별 광고가 몇 개 있기는 하지만). 가깝게는 지난 벤쿠버 겨울올림픽 스타 가운데 CF모델로 활약하는 선수가 있는가? 물론 광고계 블루칩 김연아 선수를 제외하고 말이다.
인지도와 이미지가 모델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봤을 때, 그들의 인지도는 최고였고 그들의 휴먼스토리는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역도선수 장미란이 등장한 CF는 두 편에 불과했고, 유도선수 최민호도 반짝 스타에 그쳤다. 왜 그럴까?
스포츠 이벤트가 휩쓸고 지나가면 영웅이 탄생하고 그 영웅에게 CF 의뢰가 쏟아진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와, 이제 곧 이들이 엄청난 돈 방석에 앉겠구나!" 나도 이 영웅들의 모델료를 문의했던 광고기획자 중에 하나다. 그러나 실제 실행에 옮겨 광고 촬영까지 진행한 사람은 지금까지 안정환 선수 한 명이었다.
광고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들고 유지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스포츠 선수는 불과 몇 개월 만에 금메달리스트에서 예선 탈락자가 되기도 하고, 지난해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였다 올해 매일 불펜을 지킬 수도 있다. 이런 기량 변수 때문에 스포츠 선수를 기용하는 데는 리스크가 따른다. 브랜드 이미지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연기자들은 아무런 활동 없이 광고에만 등장해도 광고주가 원하는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지만, 스포츠스타는 그들의 매력의 원천인 '성과'없이는 대중의 관심을 이어갈 수 없다. 이미 수년간 검증된 성과를 자랑하는 박지성,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적인 스케이트 요정 김연아 등을 제외하면 한 브랜드의 모델로 오랫동안 활동하는 스포츠스타가 드문 이유다.
한번은 전국체전의 '얼짱 스타'로 수차례 신문지상에 오르내린 선수를 섭외하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감독은 너무 높은 개런티와 협찬물품을 요구했다. 감독은 "여기저기서 모델 섭외 요청이 들어오고 있으니 이 정도 대접이 아니면 협조하지 않겠다"는 피드백을 보내왔다. 그래서 그를 기용하려던 계획을 깨끗이 접고 말았다. 그는 그 후 어떤 CF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월드컵 마케팅의 일환으로 방송된 올레 KT 광고. 어설픈 실력의 ‘황선홍 밴드’가 웃음을 준다. ▶ 리스크는 광고회사, 광고주의 몫
그 감독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광고기획자들이 그저 몸값과 출연 의사를 물어보는 것과 실제 계약을 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모델 한 명을 결정하기 위해 광고회사는 10배수 이상의 모델과 접촉하고 조건을 확인한다. 광고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모델 중 10%만이 실제 계약을 체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광고인들은 광고 섭외 연락이 많이 들어온다는 기사를 믿지 않는다. 실제 계약서가 오가는 날까지 아무것도 확정적으로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연아 같은 대형 스포츠 스타는 모델비 이외에 보너스 계약까지 맺기도 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경우 추가로 보너스를 받기로 하는 것이다. 성적에 따라 그만큼 광고효과가 커지게 되므로 합리적인 계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적 하락에 대한 계약은 없다. 그런 위험은 광고회사와 광고주의 몫이다. 그래서 스포츠 스타와의 모델 계약은 어렵기만 하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 이후엔 누가 스타가 될까. 광고기획자를 떠나 국민 한 사람의 입장에서이들 모두가 광고계 스타가 될 만큼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길 바란다. 또 스포츠 선수 모델들의 한계를 깰 수 있는 영웅들이 더 많이 탄생하기를 기원한다. 이들의 활약과 앞으로 '빅모델'이 될 가능성을 점쳐보는 일은 월드컵을 보는 또 다른 재미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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