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다는것 보여주자" 봅슬레이 4인 전사의 기적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28일 21시 58분


코멘트
손을 맞잡았다. 뜨거운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졌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경기장은 관중의 응원 열기로 가득 차 바로 앞 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는 상황. 그러나 온 신경을 경기에만 집중해서였을까. 그들 사이엔 오히려 고요한 긴장감마저 흘렀다.

이윽고 맏형의 나지막한 한 마디. "후회 없이 준비했잖아. 보여 주자. 할 수 있다는 걸." 팀원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바라보며 뜨거운 눈빛을 교환했다.

드라이버 강광배(37·강원도청). 대학 시절 알파인스키 선수였던 그는 치명적인 부상(무릎십자인대 파열) 이후 인생을 건 모험을 하게 된다. 종목을 썰매인 루지로 바꾼 것. 당시 국내엔 선수도, 장비도, 지원도 없었다.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불굴의 의지. 그러나 개척자 정신 하나만으로 그는 1998년 나가노 겨울올림픽에 당당하게 나섰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와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엔 스켈리턴 선수로 출전했다. 그리고 이번 밴쿠버 겨울올림픽. '썰매의 꽃' 4인승 봅슬레이 선수이자 믿음직한 맏형으로 대표팀을 이끌었다. 3개의 썰매 종목 모두 올림픽에 출전한 건 그가 세계에서 처음이었다.

브레이크맨 김동현(23·연세대). 봅슬레이는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민감한 경기다. 작은 실수 하나로 순위가 요동치기 때문에 그만큼 경력이 중요하다. '10년은 해야 감이 온다'는 봅슬레이에서 막내 김동현의 경력은 고작 1년. 2년 전까진 선천성 청각장애로 대화조차 힘들었지만 수술로 청각을 회복한 뒤 1년 전 봅슬레이에 입문했다. 이제는 '한국 봅슬레이의 미래'가 됐다. 신체조건(185cm, 87kg)이 좋은 데다 겸손하고 성실해 강광배가 그동안 혼자 짊어 진 짐을 덜어 줄 기대주로 평가받는다.

푸셔인 김정수(29·강원도청)와 이진희(26·강릉대). 각각 역도와 창던지기 선수 출신인 이들은 봅슬레이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얻었다. "역도를 할 땐 머리털까지 빠질 만큼 스트레스가 심해 고생했어요. 근데 봅슬레이는 힘들긴 하지만 머리털이 다시 나는 느낌이네요."(김정수) "봅슬레이 출발선에 서면 긴장감으로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또 그 짜릿함을 그리워합니다."(이진희).

이들 4인의 전사는 28일 캐나다 휘슬러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남자 4인승 결선 레이스에 출전했다. 휘슬러 코스는 연습 도중 사고가 속출해 '죽음의 코스'로 악명 높은 곳. 하지만 오히려 공격적인 레이스로 거침없이 질주했다. 강광배는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데 그 짧은 순간에 그동안의 모든 힘든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치더라. 또 어머니와 아내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결과는 52초92. 4차 시기까지 합산한 종합 성적은 3분31초13으로 19위. 세계랭킹 36위인 한국은 올림픽 첫 출전 만에 20위 안에 입성하며 작은 기적을 이뤘다. 또 한국보다 60년 이상 역사가 앞선 일본(21위)을 제치고 아시아 정상 타이틀까지 얻었다. 일본엔 봅슬레이 팀만 30개가 넘는다. 하지만 한국엔 아직 봅슬레이 경기장조차 없다.

이날 레이스가 끝난 뒤 이들은 서로를 말없이 안아 줬다. 조용히 목표 달성을 축하하는데 눈에서 뭔가가 흘러 내렸다. 강광배는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팀원들을 보니 눈물이 흘렀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들은 벌써부터 4년 뒤 소치 겨울올림픽을 내다보고 있다. 김동현은 기수가 경주마를 어루만지듯 정성스럽게 썰매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얘기했다.

"여기서 안주할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신진우기자 niceshi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