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피플] 한화 이범호 “WBC서 얻은 것? 자신감이죠”

  • 입력 2009년 3월 31일 08시 02분


[인터뷰 도중 한화 홍보팀 임헌린 과장이 물컵을 건네줬다. 그러자 이범호는 “이럴 때 위상이 달라진 걸 느껴요”라고 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최고 3루수로 뽑힌 소감을 물어도 “누가 뽑았어요? 잘못 뽑은 거 아니에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28일 히어로즈와의 시범경기 직전 대전구장에서 만난 이범호는 예전 그대로였다. WBC에서도 한화에서 하던 대로 했을 뿐이라고 했다. ‘나는 그대론데 사람들이 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뿐’이라고 했다. 세계가 한국야구를 저평가했다가 화들짝 놀랐듯 우리도 이범호를 너무 작게 봐왔던 것 아닐까. WBC는 이런 편향된 시각을 바로잡은 계기란 데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 같다.]

○꽃보다 범호서 여우보다 범호로

이범호는 WBC 최고의 장면으로 일본과의 결승전 9회말 투아웃에서 다르빗슈를 상대로 터뜨린 좌익수 앞 동점 적시타를 꼽았다. “전에도 다르빗슈를 상대했는데 못 쳤어요. 타석 들어서기 전부터 슬라이더를 노리고 있었어요. 전 경기에서 다나카의 직구를 받아쳐 중월 펜스를 넘기는 홈런을 뽑아냈기에 변화구로 승부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순박한 외모와 달리 이범호는 이렇게 ‘꾀돌이’다. 승부를 할줄 안다. 일본과의 4강 결정전에서 얻어낸 쐐기 밀어내기 볼넷도 볼 카운트 2-0의 절대 불리한 조건에서 얻어냈다. 좌투수 이와타가 볼이 많은 것을 간파하고, 볼 카운트가 몰렸어도 오히려 스트라이크존을 좁혔다. 변화구 유인구를 예상하고, 참았고 그대로 됐다. 이범호가 WBC 3방의 홈런 중 “최고”로 친 다나카 상대 홈런도 투 볼에서 직구 스트라이크를 예견하고 있었다. 예측하고 스윙하니까 중심에 맞힐 수 있었고, 짧게 치려고 의도한 이상의 장타가 될 수 있었다.

결승전 동점타는 맞는 순간 안타를 직감했다. “친 순간 솔직히 누가 떠오를 계제가 아니었어요. 그저 ‘이제 이길 수 있겠구나’란 생각만 들었어요.” 그러나 그 안타 직후 이범호는 1루에서 오버액션을 아끼지 않았다. 평소의 이범호라면 “투수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좀처럼 그러지 않는데 말이다. “한일전은 분위기 싸움이잖아요? 의도적으로 팀 분위기를 띄우려고 모션을 취했습니다.” 이쯤되면 ‘꽃보다 범호’가 아니라 ‘여우보다 범호’다.

○제2기 WBC 대표팀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2006년 제1회 WBC에서도 이범호는 사실상 주전 3루수로 발탁됐다. 김동주가 첫 경기에서 어깨부상을 입고 이탈하자 기회가 왔다. 놓치지 않고, 3루를 철벽처럼 지켜냈다. 병역혜택도 받았다. 3년 후 2회 대회에서도 처음엔 마음을 비웠다. 하와이 캠프까지도 SK 최정에게 밀릴 것을 각오했다. 더구나 3루엔 이대호가 있었다.

다만 ‘이때도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자’는 다짐을 관철했다. 놀랍게도 그에게 기회를 제안한 자는 경쟁자 이대호였다. “일본전이 끝나고 대호가 저에게 와서 ‘3루 수비가 부담스럽다’고 고민을 토로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일전이 정 부담스럽다면 그 경기는 내가 맡을 테니 다른 경기는 잘하라’고 얘기해줬어요. 그 후 코치진이 3루 수비를 맡기시더라고요.”

이렇게 일견 꺼내기 힘든 고민도 스스럼없이 토로한 점이 3년 전과 다른 2기 WBC 대표팀의 분위기였다. 미국으로 넘어간 이후 감기몸살로 계속 몸이 안 좋았지만 되도록 출장을 강행한 이유도 팀원을 배려해서였다. “감기에 이동거리, 시차까지 체력이 말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유격수 (박)기혁이의 수비범위가 넓어지면 체력적으로 더 힘들 것 같았어요.”

또 하나, 묻지도 않았는데 임창용 얘기를 먼저 꺼낸 것도 인상적이었다. “결승전에서 맞았다고 그 앞에 잘 해왔던 게 다 잊혀지는 것 같네요.” 나카지마의 비신사적 손동작 탓에 2루수 고영민이 크게 다칠 뻔한 상황에 대해서도 이범호는 “류중일 코치께서 3루에 던지라 했는데 내가 판단을 잘못했어요”라고 자책, 마음을 썼다.

○저의 동점타가 국민들에게 도움이 됐다면…

WBC의 소득으로 이범호는 망설임 없이 “자신감”을 꼽았다. “(모두가) 주저앉는다고 생각했을 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 동점타가 나온 거잖아요?”라고 일본전 9회말 투아웃 장면을 되새겼고, 자평했다.

WBC를 치르느라 몸 상태가 녹초가 돼 있지만 “언제 그런 투수들을 상대해 보겠어요? 메이저리거든 일본선수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왔으니” 만족한다. 해외 진출의 가능성도 발견했다. 그러나 시즌 후 FA 자격을 얻는 이범호는 “매년 20홈런-80타점을 목표로 잡는데 올핸 133경기로 늘어났으니까 25홈런까지 올려보고 싶네요. 2006년에도 WBC 후유증으로 힘들었는데 그때 경험이 있으니까 여름을 잘 넘겨야죠”라고 말했다.

대전|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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