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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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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중퇴 학력으로 수영대표팀 첫 감독
참았던 눈물이 줄줄 흘렀다. 험난했던 한국 수영의 올림픽 도전사만큼이나 갖은 사연을 담고 있는 사나이의 눈물이었다. 박태환의 스승 노민상(52·사진) 감독. 한국 수영사의 가장 화려한 페이지는 그와 박태환의 운명적 만남에서 시작됐다.
1996년 초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수영클럽.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일곱 살 꼬마가 음료수 캔을 두 손에 꼭 쥐고 앞으로 오는 게 아니겠어요. ‘너 누구냐’라고 물었더니 ‘수영하러 왔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물속에 집어넣어 보니 곧잘 수영을 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의 박태환이 될 줄은 몰랐죠.”
노 감독에게 박태환은 지도자 인생을 꽃피울 수 있게 해준 보배였다. 노 감독은 수영 명문 오산고에 입학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고교를 중퇴하고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대표선수도 해본 적이 없었다. ‘잡초 지도자’라는 별명이 생긴 이유다. 1980년 군 복무를 마친 노 감독은 서울 반원초교에서 코치로 지도자 인생을 시작한 뒤 1983년부터 대치동의 한 스포츠센터에서 수영을 가르쳤다.
군 행정병 출신인 그는 매우 꼼꼼하다. 그날 훈련한 기록을 모두 일지에 손으로 적는다. 다음 날 훈련 스케줄도 모두 일지에 있다. 중요한 내용은 빨간색으로 써 놓는다. 큰 대회를 앞두고서는 잠잘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만든 박태환의 일지가 수천 장이 넘는다.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것은 2006년 8월 캐나다에서 열린 범태평양수영대회 직전이었다. 고교 중퇴 학력 소유자가 수영대표팀 감독을 맡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노 감독은 2006년 도하 아시아경기에서 3관왕을 이뤄낸 뒤가 오히려 힘들었다. 박태환이 개인 훈련을 하겠다며 그의 곁을 떠난 것. 우여곡절 끝에 박태환을 다시 지도하게 된 그는 올림픽을 5개월 앞두고 서로 최선을 다하자는 담판을 짓고 훈련을 시작했다.
온갖 신경을 쓰느라 몸이 젓가락처럼 야윈 그는 경기를 앞두고 “(태환이가) 금메달을 못 따면 머리 깎고 절에나 들어갈 생각”이라고 했다.
노 감독은 “베이징에 오기 전에 태릉선수촌에서 시뮬레이션 훈련을 했다. 결승전 당일과 똑같은 스케줄로 하는 예행연습이다. 입장 시간, 팬티 갈아입는 순간, 소변보는 시간까지 모두 경기 당일과 똑같이 했다. 이때 3분41초대 기록이 나왔다. 시뮬레이션 기록이 좋게 나와 좋은 성적을 예상했다”고 말했다.
베이징=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이승건 기자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