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폴란드

  • 입력 2002년 6월 5일 01시 32분


90분간의 혈전이 끝난 후 폴란드 선수들은 고개를 숙였다. 표정은 침울했고 축 처진 어깨 위로는 뜨거운 눈물 방울이 흘러내렸다. 본부석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경기를 관전하던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은 머릿속에 숱한 상념이 스쳐 지나는 듯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폴란드도 이날 경기는 도저히,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승부처였다. 한국이 월드컵 사상 첫 승에 목말라 했다면 폴란드는 한국이 월드컵 5회 연속 본선 진출의 물꼬를 텄던 86년 멕시코대회 이후 16년 만에 다시 본선 무대를 밟았고 옛 영광을 재현해야 한다는 국민의 한결같은 염원을 안고 이날 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폴란드는 한국의 ‘첫 승 제물’을 면치 못했다. 16강 진출을 위해 대통령이 나서 귀화시킨 올리사데베의 발은 전방위에서 가해지는 한국의 강한 압박에 빛을 잃었고 후반 해결사로 투입한 크리샤워비치의 최근 상승세도 한국의 높은 벽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제브와코프, 봉크, 바우도흐, 하이토 등 유럽 빅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철의 수비벽도 한국의 좌우 측면 돌파를 막아내기엔 발이 무뎠고 유럽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로 평가받았던 두데크도 2골을 헌납하며 땅을 쳐야 했다.

폴란드는 74년 독일대회 3, 4위전에서 남미 최강 브라질을 꺾은 데 이어 82년 스페인대회 3, 4위전에서도 프랑스를 꺾는 등 70, 80년대 월드컵에서 3번이나 8강 이상의 성적을 올린 동유럽 전통의 명가였다. 이후 90년대 ‘젊은 피’ 육성에 실패, 긴 암흑기를 거쳤으나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유럽 지역 예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을 정도로 재도약의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폴란드로선 월드컵 직전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프랑스를 상대로 ‘유럽 징크스’를 완전히 깬 한국을 만난 것이 불운이었다. 4만8760명의 홈 관중을 상대로 벅찬 경기를 펼쳐야 했던 것은 더 더욱 큰 불운이었다. 이제 폴란드는 포르투갈, 미국과 힘겨운 살아남기 경쟁을 벌여야 한다. 16강에 함께 가자던 예지 엥겔 감독이 약속을 지켜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선수들 한마디

▽예지 두데크(골키퍼)〓15분까지는 잘 뛰었는데 이후는 우리가 잘 못 뛰었다. 왜 그랬는지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5만 관중의 광적인 응원에 우리 선수들이 위축된 것 같기도 하다. 골이 들어갈 때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만으로 골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16강에 한국과 함께 갈 것이다.

▽토마시 바우도흐(수비수)〓우리가 못한 게 아니라 한국이 잘했다. 우리 팀은 포르투갈전에선 다른 시스템으로 나설 것이다. 16강은 우리가 간다.

△야체크 크시노베크(미드필더)〓한국팀이 예상보다 더 강했다. 우리 팀의 컨디션은 좋았지만 한국은 강했고 그들은 열광적인 팬이 함께하는 홈 그라운드라는 이점이 있었다. 한국 팬들이 그렇게 열광할지는 상상도 못했다.

부산〓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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