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만 중증 정신질환자… 병원 나오면 ‘치료절벽’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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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 치료 ‘끊어진 연결고리’]
퇴원후 지속적 치료체계 미흡
20년간 딸 돌보는 78세 노모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삶”

올해 78세인 이진숙(가명) 씨는 지나온 세월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삶’ 같다고 생각한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었던 시간들. 20여 년 전, 딸(41)에게 조현병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그때부터 고통은 시작됐다.

서른일곱에 얻은 외동딸이었다. 평범했던 딸은 고3 무렵부터 조금씩 변했다. 부쩍 말수가 없어지더니, 수능 날에는 화장실에 들어가 나오질 않아 겨우 달래 시험장에 보냈다. 밥도 먹지 않아 입맛을 돋울 만한 온갖 음식을 먹여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키가 160cm 조금 안 되는 딸은 그 무렵 몸무게가 33kg이었다.

딸은 더 이상 이 씨가 알던 아이가 아니었다. 딸은 소파, 옷장, 침대를 내다 버리라고 했다. 장판부터 벽시계, 액자, 화장실 환풍구까지 뜯어 버리려 했다. 이 모든 게 중증 정신질환 발병 전 주로 나타나는 행동이라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

딸이 스무 살이 된 해, 우여곡절 끝에 병원에 입원시키고 퇴원하는 날. 이 씨는 이제 치료를 받았으니 괜찮아질 거라 믿었지만 그 믿음은 곧 깨졌다. 퇴원 후에 약을 잘 먹겠다고 약속했던 딸은 약을 입에 털어 넣지 않았다. 결국 병세가 나빠져 2번이나 더 입·퇴원을 반복했다. “제발 약 먹자.” “싫어!” 이 입씨름이 20년을 넘었다. 그저 간절히 바란다. ‘제발 누구든 우리 딸이 약을 꼬박꼬박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딸은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좋으니 남들처럼 밥벌이를 하고 싶다는 것. 하지만 긴 치료 탓에 기본적인 사회생활 능력을 갖추지 못한 딸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이 씨는 딸을 데리고 연고 없는 시골로 내려가 구멍가게를 하나 차렸다. 작게 장사를 하면서 먹고살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이었지만 오히려 딸에게 ‘원하지도 않는 일을 시켰다’는 원망만 들었다.

이 씨에게는 이제 시간이 없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던 그 삶마저 끝나는 날, 홀로 남겨질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턱 막힌다. 그는 말했다. “누가 우리 딸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 좀 가르쳐주세요.”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이 씨의 딸처럼 조현병, 조울증 등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중증 정신질환자는 2018년 59만9956명에서 2021년 65만1813명으로 증가했다. 퇴원 이후에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재활 치료를 받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치료와 재활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턱없이 부족한 ‘치료 절벽’ 앞에서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정신질환자, 퇴원후 관리할 병원 태부족… 가족이 부담 떠안아


〈상〉 병원 밖은 ‘치료절벽’
‘최대 6개월 관리’ 참여 병원 10%… 낮 재활치료하는 곳은 3% 그쳐
“수가 낮아 인건비도 안나와” 기피… “필수의료 지원대책에 포함시켜야”
김진영(가명·49) 씨의 세 살 위 오빠는 환청과 망상 증상에 시달리는 중증 정신질환자다. 김 씨가 오빠 집에 갈 때면 종종 먹지 않고 남겨둔 약들이 눈에 띄었다. ‘왜 약이 이렇게 많이 남았냐’고 물으면 얼버무리던 오빠는 결국 병세가 악화돼 일주일 전 병원에 입원했다. 벌써 네 번째 입원이다. 입원 당시 오빠는 치료를 받아야 할 치아만 15개에 달했다. 폭식을 반복하면서 키 175cm에 몸무게가 140kg까지 불어났다. 김 씨는 “오빠는 완전히 방치됐다. 오전에는 집에 혼자 있다가 점심 시간이 지나면 ‘할 게 없다’며 그냥 길거리를 헤매곤 했다”고 말했다.

● 퇴원 환자 관리하는 병원 턱없이 부족
중증 정신질환자는 조현병, 분열형 및 망상장애, 중등도 이상 우울장애 등을 앓는 이들을 뜻한다. 중증 정신질환자 관리의 핵심은 입원 치료뿐 아니라 퇴원 후에도 외래치료를 꾸준히 받으면서 증상을 관리하는 것이다. 중증 정신질환자는 병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경우도 많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에 정부가 2020년부터 퇴원한 중증 정신질환자를 관리하는 ‘병원’을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중 하나가 ‘병원 기반 사례 관리 시범사업’이다. 이 사업에 참여하는 의료기관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으로 구성된 팀을 꾸려 환자와 가족을 면담하고 퇴원 후 최대 6개월 동안의 관리 계획을 짠다. 복약 여부를 확인하고 증상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등도 살핀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참여 가능 의료기관 368곳 중 실제로 참여하는 건 37곳(10.1%)뿐이다.

‘낮병동 관리료 시범사업’도 마찬가지다. 낮병동이란 중증 정신질환자에게 낮 시간 동안 재활치료를 제공하는 병원의 병동이다. 이곳에서 대인관계 및 사회적응 훈련, 취업교육 등도 함께 이뤄진다. 예를 들어 조현병은 대부분 10대 때 처음 발병하기 때문에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해 사회에 적응하고 함께 어울리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사업 역시 참여 가능 의료기관 2102곳 중 실제 참여하는 건 64곳(3.0%)에 불과하다.

현장 의료진들은 낮은 수가(건강보험에서 병원에 주는 진료비)를 참여율이 낮은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서영수 부산다움병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낮병동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 중 일부만 수가를 청구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지금 수가로는 의료진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 환자 관리할 지역 센터는 만성 인력난
현행 정신건강복지법상 정신의료기관은 환자가 퇴원할 때 본인의 동의를 받아 퇴원 사실을 지역 내 정신건강복지센터에 통보해야 한다. 퇴원 후에도 환자가 꾸준히 전문가에게 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는 센터는 이들에 대한 사례 관리를 제대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 씨는 “센터 담당자가 너무 바빠 보인다. 가족 입장에서 궁금한 것도 많은데 한 번도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복지부의 ‘국가 정신건강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의료기관에서 치료받은 조현병, 분열형 및 망상장애 환자 중 13%(2021년 말 기준)만 정신건강복지센터 등 지역사회에서 정부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례 관리자 1명이 담당하는 환자 수는 무려 26.6명에 달했다. 이해우 서울시정신건강복지센터장은 “센터에서 재난심리 등 모든 정신건강 업무를 도맡고 있기 때문에 중증 정신질환자를 관리할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도 ‘필수의료’”

전문가들은 대표적인 필수의료 분야로 꼽히는 소아청소년과, 외과 등뿐만 아니라 급성기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 역시 필수의료 지원대책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신건강의학과가 전공의 지원율이 높은 인기 과로 보이지만, 정작 급성기 중증환자들을 치료하고 이들의 재활까지 담당할 인력 및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일본에서는 퇴원 전후로 의료진이 중증 정신질환자의 집에 찾아가 가족들에게 환자와 대화하는 법을 알려주고 주거 환경까지 살핀다. 이에 대한 수가가 별도로 책정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가 퇴원한 중증 정신질환자를 관리하는 체계를 탄탄하게 만들어 모든 부담을 환자와 가족들에게 떠넘기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소영 기자 ksy@donga.com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65만 중증 정신질환자#병원#치료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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