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했던 주민들, 신속했던 소방대… ‘사망자 0명’ 기적 일궈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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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33층 주상복합 화재]주민 300여명 서로 도우며 대피


8일 밤 발생한 울산 삼환아르누보 주상복합아파트의 화재는 발생 초기 33층 건물 외벽 전체가 불길에 휩싸일 정도로 크고 거셌다. 바람을 타고 날린 불씨가 인근 대형마트에 떨어져 불이 옮겨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수라장 같은 현장에서도 주민들은 서로를 도와가며 어둠을 뚫고 화재 현장을 탈출했다. 현장 소방대원도 “주민들이 서로를 챙기며 침착하게 탈출해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칭찬했다.

○ “여성과 아이, 노약자 먼저”

불이 크게 번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주민 20여 명은 소방관의 안내를 받아 옥상으로 대피했다. 그런데 한 남성이 “어린이와 여성분들 먼저 올려보냅시다”라고 소리쳤다. 당장 일분일초가 급했지만,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남성들은 뒤로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이와 여성, 노인들을 앞줄로 보내며 자리를 바꾼 것이다.

21층에 사는 주민 이경래 씨(58)는 “실제로 어린아이들을 선두에 세우니 아무래도 걸음이 느려졌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차분하게 올라가서 다들 찰과상 하나 없이 안전하게 옥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18층에 살고 있는 김경용 씨(57)도 “우리 가족은 자녀들도 30대라 모두 맨 뒤에 서서 따라갔다. 물론 뒤에 서는 게 솔직히 불안하긴 했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날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이동한 26명의 주민은 모두 무사히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옥상으로 대피했던 김 씨는 아래층 어딘가에서 여성 목소리를 듣곤 곧장 소방대원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현장 소방대원은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도와준 덕에 현장 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감사했다.

먼저 탈출한 주민들은 이웃들과 휴대전화나 모바일 메신저로 소통해 소방대원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아파트 1층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50대 여성 A 씨도 28층으로 대피한 한 주민과 휴대전화로 통화해 현장지휘본부에 상황을 전달했다. 당시 소방관이 A 씨의 전화를 넘겨받아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침착하게 기다려 달라. 곧 소방대가 갈 테니 흥분하지 말고 자주 전화해 달라”고 당부한 뒤 구출했다.

○ 집마다 문 두드리고 변기 물 적셔 탈출

9일 울산에서 만난 주민들은 당시 상황만 떠올려도 온몸이 떨린다는 이들이 많았다. 이날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병원에 이송된 주민은 90명이 넘는다. 대부분 연기 흡입이나 가벼운 찰과상 등 경미한 부상만 있었다. 중상자 3명도 연기 흡입 등이 원인으로 생명에 지장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은 “하늘이 도왔다”고 했지만, 서로를 도와가며 차분하게 피신한 대응이 빛났다. 많은 주민들이 화마를 피해 이동하는 상황에서도 이웃집들의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렸다.

대피 중에 두 딸을 놓쳤던 허모 씨(44)도 이웃을 챙기느라 돌발 상황을 맞았다고 한다. 가족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며 집집마다 벨을 누르면서 ‘불이 났다’고 알렸다. 그런데 잠깐 아이들과 몇 발자국 떨어진 사이에 갑자기 사방에서 연기가 들이닥치며 서로를 잃어버렸다. 허 씨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주민들도 함께 살아야 한단 심정이었다”며 “이웃이 딸을 보듬어주고 대피소로 데려가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끔찍하다”고 말했다.

화재 당시 TV 시청을 하다가 창밖으로 떨어지는 불덩이를 본 주민 B 씨는 “대피하려 했더니 현관문이 화염 열기에 뜨거워져 녹아 내렸는지 열리지가 않았다”며 “설상가상으로 수돗물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B 씨는 급한 대로 변기를 열고 수건을 적신 뒤 수차례 현관문을 발로 차서 겨우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어렵사리 참사는 피했지만 이제부터 막막하다는 주민들도 많았다. 주민 김모 씨는 “가까스로 탈출은 했지만 하루아침에 살고 있던 집을 잃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울먹거렸다. 화재 당시 건물 밖에는 속옷과 맨발 차림으로 뛰쳐나온 주민들이 대다수였다.

울산=김태성 kts5710@donga.com·조응형 / 이소연 기자
#울산 주상복합 화재#인명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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