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번지자 동료들에 “먼저 나가라”… 자신은 소화기 찾다 참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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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물류센터 화재 참사]안타까운 희생자 사연들
항상 남 먼저 돕던 살뜰한 남편… ‘밥 먹었느냐’ 통화가 마지막 대화
40년 넘게 일하다 은퇴 앞둔 부친… 연휴에 가족여행 가려했는데…
착하고 성실해 사랑받던 동생… 모친 놀라실까 아직 소식 못전해

오열하는 유족 경기 이천시 물류센터 화재사고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서 30일 한 유족이 희생자의 영정사진 앞에 주저앉아 있다. 이천=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오열하는 유족 경기 이천시 물류센터 화재사고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서 30일 한 유족이 희생자의 영정사진 앞에 주저앉아 있다. 이천=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늘 남을 돕는 게 먼저였던 사람입니다. 평소에도 무슨 일이든 본인이 나서서 해결하곤 했어요. 그런데 그 순간마저도….”

지난달 29일 발생한 경기 이천시 물류센터 화재 참사로 숨진 윤모 씨(50). 처남 최모 씨는 그를 ‘이타적인 매형’으로 기억했다. 사고 당일 지하 1층에서 작업하고 있던 윤 씨는 화재가 발생한 긴박한 순간에도 함께 일하던 동료부터 챙겼다고 한다.

당시 윤 씨 주위엔 동료 5명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는 불길이 번지자 “먼저들 나가라”고 외친 뒤 소화기를 찾아 뛰어갔다. 동료 4명은 가까스로 빠져나왔지만, 그와 다른 동료는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이 동료들은 공사 현장 인근에 숙소를 얻어 동고동락해 왔다.

평소 윤 씨는 건강이 좋지 않은 아내도 살뜰히 돌봤다고 한다. 매일 2, 3번 이상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 씨의 부인은 “그날 점심에도 ‘밥은 먹었느냐’고 전화했었다. 그게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은 몰랐다”며 오열했다. 최 씨는 “매형은 가족끼리 식사하고 나면 아무리 피곤한 날에도 끝까지 정리했다”고 전했다.

30일 오후 2시경 이천시 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선 윤 씨의 가족을 비롯해 수많은 유가족들의 울음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통곡을 하다 실신 지경에 이르거나 눈에 초점을 잃은 채 정신을 놓은 가족도 적지 않았다.

분향소 한쪽에 앉아 있던 유모 씨(41) 역시 허망한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유 씨는 참사로 아버지를 잃었다. 설비공사 전문가인 아버지는 물류센터 2층에서 마감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유 씨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멋있는 분’이셨다. 평생 설비공사를 해온 아버지를 보며 자라 자신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유 씨는 “아버지를 따라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 아버진 현장에서 근사했다”며 “지난 주말에 부모님께 오리고기를 사드렸다. 평범한 하루였는데 그게 함께한 마지막 추억이 됐다”며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 약 40년 동안 현장을 뛴 아버지에겐 이번 물류센터 공사가 “은퇴를 앞둔 마지막 현장 작업”이었다. 은퇴 뒤 아내와 강원도 시골에 들어가 살려고 조그마한 집도 구해 뒀다고 한다. 그렇게 평생 고생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1일부터 유 씨 가족 모두가 그 집으로 놀러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시는 그 집에 갈 수 없게 됐다.

아끼던 막냇동생을 잃었지만 차마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한 큰형도 있었다. 참사 희생자 박모 씨(50)의 형(62)은 “착하고 성실해 가족에게 사랑받던 동생을 이리 보낼 줄 꿈에도 몰랐다. 어머니가 심장이 많이 약하시다. 너무 놀라셔서 건강을 해칠까 봐 아직 얘기도 못 꺼냈다”고 했다. 또 다른 희생자 김모 씨의 조카인 이모 씨(19·여)는 “외삼촌은 벌이가 넉넉하지 않을 때도 항상 환하게 웃으며 용돈을 쥐여주셨다. 너무 보고 싶다”며 울먹였다.

물류센터에서 함께 일하다 변을 당한 가족들도 있었다. 강정현 씨(43)의 동생 강모 씨(34)와 매제 김모 씨(38)는 2층에서 작업하다 목숨을 잃었다. 공사 현장에서 함께 일하던 부자도 있었는데, 60대 아버지는 숨졌고 아들 이모 씨(35)는 위독한 상황이다.

화재 현장 옆에 마련한 피해자 가족 임시거처에서도 통곡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대부분 사고 당일부터 뜬눈으로 밤을 새운 가족들은 모두 진이 빠진 모습이었다. 한 중년 여성은 실신해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20대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는 엄태준 이천시장이 위로를 전하자 “어떡해. 불쌍해서 어떡해. 너무 착한 아이인데…”라며 통곡했다. 입술을 깨문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아내를 부축했다.

이천=한성희 chef@donga.com·김소영·김태성 기자
#이천#물류센터#화재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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