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교통 강국’ 이면엔…“시각장애인 버스 이용 여전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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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년 12월 8일 0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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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시각장애인 류모씨(34)가 서울 강남역 버스정류장에서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가 한번에 여러 대 오는 경우 타야 할 버스를 알아차릴 수 없는 류씨는 근처 시민에게 도움을 청해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2019.12.8/뉴스1© News1
지난 4일 시각장애인 류모씨(34)가 서울 강남역 버스정류장에서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가 한번에 여러 대 오는 경우 타야 할 버스를 알아차릴 수 없는 류씨는 근처 시민에게 도움을 청해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2019.12.8/뉴스1© News1
지난 4일 오후 7시, 퇴근길로 붐비는 서울 강남역에서 시각장애인 류모씨(34)를 만났다. 강남역을 나와 도착한 정류장. 이곳은 일반버스와 광역버스가 동시에 다니는 곳이라 늘 버스가 줄지어 정차한다.

5대의 버스가 동시에 정류장에서 멈췄고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류씨는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그는 “버스가 도착한 것은 알아도 정류장 어디쯤 서는지는 알 수 없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류씨는 결국 한 여성에게 다가가 도움을 구했다. “죄송한데 5003번 버스가 오면 알려줄 수 있으실까요?” 류씨는 부탁을 한 후에도 버스가 멈추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온 감각을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5003번 버스가 잠시 후 도착 예정입니다”라는 알림이 수시로 울리지만 그는 오늘도 버스를 놓칠까 두렵다.

류씨가 도움을 요청한 여성이 5003번 도착 사실을 알려줬지만, 다른 노선 버스와 동시에 멈춰선 5003번을 류씨는 여전히 쉽게 골라내기 어려웠다. 결국 여성이 5003번 문앞까지 류씨의 손을 잡아 안내하고 나서야 그는 퇴근길 버스에 무사히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버스에 오른 그는 “오늘은 그래도 친절한 분을 만나서 빨리 탔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지만 중간에 자기 버스가 오면 그냥 가시는 분들도 많아 늘 마음이 불안하다”는 그에게 버스 탑승은 하루 일과 중 가장 고된 일이다.

◇자체 솔루션 개발했지만…지자체 “소음문제 발생” 난색

지난 10월24일부터 시행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은 류씨와 같은 교통약자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충분한 편의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 법은 ‘장애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것’ ‘장애인이 대중교통에 오르고 내릴 때는 충분한 시간을 줄 것’ 등의 규정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법이 시행된 이후 한 달이 조금 지난 지난달 2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시각장애인도 버스를 탈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시각장애인들이 버스를 이용할 때 여전히 불편한 점들이 많으니 이를 정책으로 개선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 글에는 시각장애인들이 한번에 버스가 여러 대 오는 경우 타야 할 버스를 알 수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135명의 시각장애인 응답자 중 116명은 버스 번호를 인지할 수 없어 버스 탑승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답했습니다”

글을 올린 시각장애인 한혜경씨(24·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솔루션을 제작 중이다. 리모컨에 타고 싶은 버스 번호를 누르면 버스에 달린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게 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이 적용되면 시각장애인은 자신이 타야 할 버스를 소리로 쉽게 찾을 수 있다. 버스 기사가 시각장애인이 탈 것을 미리 인지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지난 10월 말 한씨는 이 솔루션을 들고 경기도청 버스정책과를 찾아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비관적이었다. ‘버스에서 소리가 나면 소음으로 인한 민원이 발생할 것’이라는 게 주요 이유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번만 소리가 나도록 시스템을 구상해봤지만 역시 긍정적인 대답은 듣지 못했다.

기자가 직접 경기도청 버스정책과에 문의한 결과도 비슷했다. 부서 관계자는 “시흥시에서 비슷한 사업을 시범 진행했지만 정류장의 안내 음성과 버스의 안내 음성이 동시에 들리자 시민들이 버스를 이용하는 데 혼선이 생겨 사업이 취소됐다”고 말했다. 또 운수조합에서는 “스피커가 설치되면 버스 세차 시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보내왔다고도 설명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오는 11일에 해당 솔루션에 대해 학생들과 회의를 가질 예정이니 추가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소음 배려 아쉬워…버스 맘놓고 타면 삶의 질 훨씬 나아질 것”
시각장애인 한혜경씨(24·여)가 지난달 30일 열린 장애인 버스 이동권 발언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한혜경씨 측 제공).2019.12.8/뉴스1
시각장애인 한혜경씨(24·여)가 지난달 30일 열린 장애인 버스 이동권 발언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한혜경씨 측 제공).2019.12.8/뉴스1

이에 대해 한씨는 “시민들에게 설문을 한 결과로는 (버스 번호 안내 음성을) 소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시각장애인을 배려하는 소리가 소음이라서 거슬린다면,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살 생각이 없다는 것 아닌가”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세차 문제도 “방수 기능이나 탈착 기능을 생각할 수 있다”며 기술적 해결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서울시도 사정은 비슷했다. 시각장애인의 버스 탑승상 불편사항과 개선방안을 문의하려고 했지만 “담당 부서가 아니다” “다른 과로 전화해보라”는 대답이 이어졌고, 여덟 군데를 거쳐서야 겨우 담당자와 연락이 닿았다.

서울시 관계자는 “정류장에 유리로 된 ‘스마트쉘터’라는 공간을 내년 하반기에 시범 설치할 예정”이라며 “버스가 도착할 경우에 자동문이 열리고, 그 자동문 앞에서만 버스에 승·하차할 수 있어 시각장애인들의 불편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 정책은 미세먼지 문제와 버스 정류장 여건 개선 등을 사업목표로 하고 있어 시각장애인의 불편이 주요 고려 대상은 아니다. 버스 번호를 알 수 없다는 문제도 여전히 남는다.

결국 지난 10월24일부터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시각장애인들은 뾰족한 해법이 나오지 않는 이상 타인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 버스를 찾아탈 수 없게 될 전망이다.

한씨는 현재 시각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용상의 불편만 없앤다면 버스가 시각장애인의 이동권에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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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은 이용이 편하지만 집이나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고, 복지콜 택시 서비스는 이용하려면 2~3시간 대기가 기본이기 때문이다.

“버스만 마음놓고 이용할 수 있다면 시각장애인의 삶의 질은 훨씬 나아질 거예요. 제가 만든 솔루션이 아니라도 좋으니, 문제가 해결돼서 시각장애인이 어디든 다닐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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