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대작(代作)’ 사건 조영남, “미술계 관행” 주장 둘러싼 갑론을박

  • 동아닷컴
  • 입력 2017년 10월 19일 10시 39분


‘그림 대작(代作)’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가수 겸 화가 조영남 씨(73)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조 씨 측은 조수가 그림을 대부분 작업했더라도 자신이 작품 창작의 주도적인 아이디어를 냈으며 이는 미술계의 ‘관행’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조 씨의 행위를 ‘사기’라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은 18일 사기 혐의로 기소된 조 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작품 판매를 도운 혐의로 함께 기소된 조 씨의 소속사 대표 겸 매니저 장모 씨(45)에게도 징역 4개월,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됐다.

조 씨는 2011년부터 지난해 4월까지 대작 화가를 고용해 그린 그림 26점을 1억8000여만 원에 판매한 혐의로 2015년 6월 재판에 넘겨졌다.

● 조영남 씨 측 “조수를 쓰는 것은 대작 아닌 관행”

조 씨 측은 조수를 쓰는 것은 대작이 아닌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조 씨 측은 “미술 분야에서는 상당 부분 조수를 쓴다. 모든 작품의 아이디어는 조 씨가 낸 것”며 혐의를 부인했다.

조 씨는 지난해 11월 열린 공판에서 “조수를 쓰는 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고 불법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며 “제가 그린 그림을 대작화가 송 씨에게 콜라주 형식으로 풀어서 그리게 했다. 수십 년 동안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게 문제가 된다고 해서 굉장히 당황했다”고 말했다.

또 “일부 (조수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일일이 그림을 사는 사람에게 알릴 의무가 있는지 의문이다. (구매자를) 속이려는 고의도 없었다”고 무죄를 주장했다.

● 미술 단체 “‘미술계 관행’ 주장 조 씨, 미술인들 명예 훼손해”

지난해 한국미술협회와 한국전업미술가협회 등 11개 미술 단체에서는 “조수를 쓰는 것은 관행이 아니다”라며 조 씨가 미술인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는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고소는 각하 처분을 받았다.

이들의 주장은 이렇다. 서양에서는 예전부터 조수를 써서 미술품을 제작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미술품이 예술가의 자주적 인격의 소산이라는 의식이 강화됐고, 19세기 인상파 이후로는 화가가 조수의 도움 없이 홀로 작업하는 것이 근대미술의 일반적인 경향이 됐다는 것이다.

● 진중권 교수 “미술계 관행 맞아…조영남, 여론재판으로 매장되기 좋은 상황”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 석사 출신으로 여러 권의 미학 서적을 낸 진중권 동양대 교수(54)는 당시 조 씨 측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그는 여러 차례 트위터에 긴 글을 올리며 “개념미술과 팝아트 이후 작가는 콘셉트만 제공하고, 물리적 실행은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게 꽤 일반화한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앤디 워홀은 ‘나는 그림 같은 거 직접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미니멀리스트나 개념미술가들도 실행은 철공소나 작업장에 맡겼다. 작품의 콘셉트를 누가 제공했느냐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념은 고루하기에 여론재판으로 매장하기 딱 좋은 상황”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 씨가 불구속 기소되자 “도대체 현대예술의 규칙을 왜 이 나라에선 검찰이 제정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미술단체들이 조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건에 대해서는 “인상주의 이후엔 조수를 쓰는 관행이 사라졌다? 무식한 소리. 잠깐 사라졌다가 50년대 이후 광범위하게 퍼졌다가 최근엔 대세가 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서양미술사 전체에서 조수를 쓰지 않는 작업만을 예술로 보는 관행은 낭만주의 미학의 영향으로 19세기말에 잠깐 나타났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사라진, 예외적 현상이었다”고 설명했다.

● 법원 “작품 기여도를 봤을 때 조수 아닌 작가로 봐야”

법원은 조 씨의 행위를 미술계의 ‘관행’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송 씨 등이 작품에 기여한 정도를 볼 때 조수라기보다 작품에 독립적으로 참여한 작가로 봐야 한다며 조 씨의 행위는 사기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작품 제작에서 작가의 머릿속 아이디어나 소재가 구체적으로 외부에 표출되는 창작적 표현 작업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며 “조 씨는 (대작 화가) 송 씨에게 대략적 작업 방식만 제시했을 뿐 세부 작업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완성 단계의 작품을 건네받아 배경을 덧칠하는 등 일부 추가 작업만 더해 전시, 판매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작가가 창작 표현까지 전적으로 관여했는지는 그림의 판매 및 가격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며 “피고인이 대작 화가의 존재를 숨긴 것은 그림 구매자를 속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 네티즌 “관행이라고? 대중을 향한 사기 아냐?”

조 씨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네티즌들은 대체로 재판부의 판결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이들은 관련 기사에 댓글을 달아 “이 판결이 옳다고 생각한다. 도제도 아니고 조수로 고용한 것도 아니고 대작한다는 걸 비밀에 붙였다면 사기(hhj_****)” “대작화가 그린 그림을 자기가 그렸다고 하고 전시회까지 열어 그림을 자기작품으로 판매했다면 그건 기망에 의한 사기죄에 해당한다. 그것을 구매자에게 자기작품으로 속이고 판매했다면 그건 사기(badb****)” “외국 작가들은 조수 쓰면 떳떳이 미리 다 밝힘. 구매자도 그걸 알고 삼. 근데 이 양반은 모두에게 숨겨오다 걸린 것(scol****)”이라고 지적했다.

“관행이랍시고 만들어서 헐값주고 그리게 해서 자기가 독차지해서 그림으로 엄청난 수익 올리기(puru****)” “관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작가가 자기의 그림, 책을 스스로 쓰지 않는 게 관행이라면 뭐 하러 작가 예술가라는 이름을 달고 자기이름을 걸고 작품을 팔지? 이거야 말로 대중을 향한 사기 아냐? (lhs5****)” “미술계에서는 조수를 쓸 때 제대로 된 급여를 지불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한다. 그것이 관행(insa****)”이라는 댓글들도 눈에 띄었다.

한편 조 씨는 “유죄가 선고돼 당황스럽다”며 즉각 항소를 제기하겠다는 뜻을 밝힌 상태다.

박예슬 동아닷컴 기자 ys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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