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이모 씨(27·여)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지난달 25일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일대에서 친구와 둘이 술을 마시고 있던 중 한 남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는 자기 일행도 둘이라며 합석을 제안했다. 이 씨는 잠시 고민한 끝에 남성들과 자리를 옮겨 술자리를 이어갔다. 합석한지 2시간이 흘렀을까. 친구와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 이 씨 일행이 앉아있던 자리엔 두고 갔던 가방만 놓여있었다. 20분 동안 남성들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화가 나 술집을 빠져나가려던 이 씨를 술값을 계산하라며 종업원이 막았다. 이 씨는 도망간 남성들을 대신해 8만 원이 넘는 술값을 내야 했다.
술집에서 여성과 합석을 한 뒤 술값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남성들이 출몰하면서 ‘합튀남(합석하고 도망가는 남자)주의보’가 떴다. 남성들은 상대 여성과 합석 후 여성들이 화장실을 간 사이 몰래 자리를 뜨거나 전화를 받는 척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최근 5년 새 20대, 30대들을 중심으로 술자리에서 합석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서울 강남역과 홍대입구 일대 60여 곳의 ‘헌팅 술집’마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금요일과 토요일에 주로 합튀남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강남역 한 술집종업원 전모 씨(24)는 “2년 전만 해도 주로 여성들이 합석한 남성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도망가곤 했다. 최근에는 매주 3~4회 정도 도망가는 남성들이 나타나 그 숫자가 비슷해졌다”고 말했다.
합튀남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남녀관계에 있어 ‘을(乙)들의 반란’이라며 정당화한다. 합튀를 해본 적이 있다는 회사원 김모 씨(27)는 “합석할 때는 늘 남자들이 돈을 낸다. 그런데 여자들이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앉아있거나 아랫사람 취급을 하면 짜증이 난다”며 “그럴 때 도망을 생각하게 되고 실제로 성공하면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학생 정모 씨(25)도 “물론 도망가면 죄짓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놀기 위해 만든 술자리에서까지 여성에게 갑질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어진다”고 했다.
‘합석 자리에서 술값을 누가 내야 하는가’의 문제는 합석 문화가 자리 잡아 가는 과정에서 남녀 사이의 갈등 요인이 된다. 합튀남의 등장도 이런 갈등의 한 부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합튀남들은 남녀가 만날 때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술값을 내야 한다는 문화가 형성돼 있다고 말한다. 대학생 김모 씨(26)는 “자기들끼리 먹은 술값까지 대놓고 계산해주기를 바라는 여자들이 많다”며 “남성들이 술값을 내겠다고 하지 않으면 아예 자리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남자들에게 술값을 내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는 반응이다. 회사원 장모 씨(26·여)는 “왜 자신들이 먼저 술값을 내겠다고 말해 놓고는 우리가 내라고 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도 충분히 벌고 있고 마음만 맞으면 같이 나눠서 내면 되지 않냐”며 반발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합석을 먼저 제안한 사람이 술값을 내야 하나’를 두고 댓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고 경기 수원시에서는 한 20대 남성이 합튀하다가 붙잡혀 상대 여성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합튀남들의 등장에 대해 남성들의 ‘소심한 복수’라 분석한다.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진데다 학점, 취업 등 경쟁이 심화되면서 남성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밀리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성들이 여성을 수평적 경쟁상대로 생각하게 되면서 박탈감과 시기심을 동시에 갖게 됐다.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생각이 술자리에서조차 이어져 ‘도망’이라는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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