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의 오늘과 내일]내가 피운다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 동아일보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생각해보니 범죄 같은 짓이었다. 대학생 시절 기숙사에서 신입생에게 흡연을 가르치는 ‘조교’ 역할을 했다. 담배 연기를 마시고 구토 증세를 호소했던 후배에게까지 “그렇게 배우는 것”이라며 잘난 척을 했다.

“25년 동안 남들에게 정말 큰 피해를 주고 살았구나”라고 깨달은 건 금연한 지 반 년쯤 후다. 지인 중 한 흡연자가 얼굴을 가까이하고 말을 하는데 갑자기 입에서 역겨운 냄새가 났다. 그때부터였다. 흡연자가 가까이 와 말을 하면 슬쩍 내 얼굴을 돌리거나 자연스럽게 듣는 척하며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어쩔 수 없었다.

대통령직속 규제개혁위원회가 4월 22일 국민건강증진법 시행령 개정안 심사 후 ‘금연효과가 더 높다는 근거가 없다, 진열대 교체비용이 든다’며 담배 경고 그림을 담뱃갑 상단에 붙이게 한 조항의 삭제를 권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 그렇게 뻔뻔하게 업자의 논리를 대변할 수 있는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국민적 반발이 거세지자 규개위는 13일 재심에서 경고그림을 상단에 넣도록 결정을 뒤집었다. 그런데 며칠 후 이상한 얘기가 들렸다. 재심회의에서 적잖은 민간위원들이 “정부의 언론 플레이 때문에 우리가 담배회사 로비를 받은 것처럼 매도당했다”고 목청을 높이면서 원심 결정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담배회사 로비를 받았는지는 관심 없다. 정말 걱정되는 건 그토록 속이 뻔히 보이는 결정을 해놓고도 반성은커녕 자신들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떠드는 그런 뻔뻔한 부류가 중요한 공직에 있다는 사실이다. 현 규개위는 국무총리(당연직위원장)와 민간공동위원장을 포함해 민간위원이 17명, 정부위원이 7명이다. 임기는 2년, 대통령이 위촉한다. 수당은 주지만 아주 다행히도 월급은 안 준다. 이번 재심에는 민간위원장과 담배회사 경력이 논란이 된 위원 등은 불참했으며 민간 13명, 정부 6명이 참석했다. 재심에서까지 국민 건강은 뒤로 제쳐놓고 담배회사 편만 든 위원들은 누군지 취재해 반드시 해명을 들어볼 것이다.

규제개혁에 관한 세계적 흐름은 경쟁과 혁신, 성장을 저해하는 정부의 각종 경제적 규제를 철폐하는 것 못지않게 환경오염이나 상품의 안전기준, 근로조건 등 국민 건강과 복지를 위한 사회적 규제에 정부가 적극 개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단순히 기업만 잘 돌아가게 하는 게 규제개혁이 아니란 뜻이다.

“내 돈 주고 사 피우는데 무슨 상관이냐”라는 흡연자들에게 해 줄 얘기가 있다. 담배 연기는 흡연자가 마시고 내뿜는 주류연과 담배가 스스로 연소돼 발생하는 부류연으로 구분되는데 간접흡연으로 흡입되는 연기의 80%가 부류연이다. 더 중요한 건 유해성분이 부류연에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특히 니코틴은 부류연에 231배나 많다는 연구까지 있다. 부류연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더 큰 피해를 준다는 건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남편이 흡연자면 아내가 간접흡연으로 폐암에 걸릴 위험도가 2배 높아지고, 남편이 30년 이상 흡연하면 그 위험도는 3.1배로 높아진다. 부모의 흡연은 자녀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같은 증상을 부를 수도 있다. 건강보험이 흡연 때문에 지출하는 진료비는 연 2조 원이 넘는다.

그런데도 주변에는 경제논리만 따지고 국민 건강이나 환경 문제는 우습게 아는 공무원이나 지식인들이 많다. 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금연정책을 펼치는 호주의 경우 현재 갑당 2만5000원 안팎의 담뱃값을 2020년 3만4000원까지 올릴 계획이다. 담배 소비를 줄이기 위해 가격을 더 올리거나 대기오염을 낮추기 위해 경유가격을 올리는 가격정책은 다양한 비가격정책과 함께 가장 우선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국민 건강을 위해서다.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taylor55@donga.com
#담배#금연#규제개혁위원회#규개위#담배 경고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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