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영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자산운용이 SK그룹을 상대로 벌인 경영권 분쟁은 한국 재계가 기업 경영권 방어의 중요성을 처음 체감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해외 투기자본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지만 잠시뿐이었다. 이후 12년간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을 방어할 만한 제도적 장치는 별반 마련된 것이 없었다.
기업은 경영권 방어가 ‘재벌가(家) 재산 보호’나 ‘경영권 승계를 위한 특혜’라는 따가운 시선을 피해 입을 닫았고, 정부는 자칫 외국인 투자 유치에 걸림돌이 될까 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국회 역시 대기업 특혜 논란을 피하기 위해 2010년 딱 한 차례 입법 과정이 진행된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필) 관련 법안마저 폐기했다.
8일 재계에 따르면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에 대한 공세를 펼치고 있는 가운데 삼성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도 외국인 지분이 높아 투기자본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런데 이는 이미 11년 전에도 똑같이 제기됐던 우려다. 삼성전자는 2004년 4월 공정거래위원회에 해외 자본에 의한 ‘적대적 M&A’ 가능성을 보고한 바 있다.
당시 삼성 관계자는 “이사회에서 외국인이 본사 이전이나 반도체사업부문 분할을 요구하거나 적대적 M&A에 나설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검토됐다”면서 “실제로 미국계의 모 자산운용사가 본사를 미국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는 등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소버린 사태가 잠잠해지면서 삼성도 지난 몇 년 새 더이상 드러내놓고 이 같은 요구를 하지 못했다. 오너 승계 및 재산 보호를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사회적 비판을 우려해서다.
‘냉가슴’을 앓기는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A그룹 관계자는 “소버린 사태 직후엔 대관·홍보 조직 등에서 비공식적으로 기업 경영권 방어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국회와 언론을 통해 전달해 왔지만 그마저도 승계 이슈와 맞물리기 시작하면서 더이상 먼저 꺼내기 부담스러운 민감한 이슈가 됐다”고 했다.
이 때문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등 경제단체들이 기업들을 대변해 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 같은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 왔지만 이마저도 번번이 무산됐다.
전경련에서 처음 정부에 관련 제도 도입을 건의한 건 소버린 사태 직후인 2004년 12월. 당시 전경련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기업 재편과 외자 유치를 위해 투자 관련 제도를 대폭 완화하면서 ‘공격자’와 ‘방어자’ 간의 균형이 무너졌다”며 포이즌필과 차등의결권, 주식 대량보유 사항 변경 시 보고 의무화 등 제도적 장치 도입을 촉구했다.
실제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이후 의무공개매수제도와 외국인이 국내 기업 지분 10% 이상 취득 시 이사회 동의를 요구했던 등의 규제들이 대거 폐지되면서 국내 기업의 외국인 지분이 치솟은 상태였다. 하지만 정부는 투자자와의 분쟁 우려 및 외자 유치가 줄어들 가능성 때문에 재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 사이 소버린은 1조 원에 가까운 차익을 남기고 SK㈜ 지분을 전량 매각했다.
똑같은 리스크는 불과 2년 만인 2006년 다시 불거졌다. 이번에는 미국계 헤지펀드인 아이칸캐피털매니지먼트가 KT&G를 공격해 경영참여 선언 10개월 만에 1500억 원의 차익을 벌어들였다. 결국 2009년 정부는 경영권 보호장치 제도화를 적극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이듬해 3월 포이즌필 도입을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하지만 결국 대기업 특혜 논란을 우려한 국회가 다시 발목을 잡았고, 개정안은 본회의 상정조차 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전경련은 올해 2월에도 차등의결권과 포이즌필 도입을 기획재정부에 정식 건의했지만 ‘검토하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에 대해 기재부 측은 “국내 대기업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재벌의 기득권과 지배권을 견고하게 하는 조치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았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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