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게 있어 언제나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제약회사 대표가 거래처 의사들과 주말 등산을 하다 숨졌다면 산업재해에 해당할까?
2003년 소규모 의약품 유통회사를 차린 A씨(51)는 의사들을 만나 제품을 설명하고 판매했다. 명함만 대표이사일 뿐, 일은 여느 제약사 영업사원 못지않았다. 병원을 일주일에 4번씩 찾아가는 것은 물론 서류 발급 등 의사들의 잔심부름, 출장길 운전대행까지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매주 주말마다 반복적으로 의사들의 취향에 따라 산행과 골프 등 여가활동도 함께했다.
그러던 2012년 4월. A 씨는 주말임에도 어김없이 대구의 한 병원 의사들과 산을 오르고 있었다. 등산 시작 약 40분 후,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낀 A씨는 식은땀을 흘리며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다 급기야 의식을 잃었다. 구조대에 의해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인은 ‘협심증’이었다. A씨의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의약품 공급회사 영업 활동 일환으로 봐야 한다”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부장판사 이승택)는 “A씨의 사망과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유족 급여 및 장의비를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10일 밝혔다. 재판부는 “거래처인 병원 의사들이 A씨 회사의 제품을 처방하도록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그들이 하는 활동에 참가하는 등 친목을 도모해야 할 업무상 필요가 있었다”며 “업무 일환으로 사건 당일에도 등산에 참여했고, 이런 등산이 과도한 육체적 피로를 가져와 기존에 앓고 있던 협심증을 악화시켰다고 봐야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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