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감 Harmony/이 사람이 사는 법]윤학 화이트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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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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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즐거워지는 일을 하자’… 마음의 소리를 들으니 행복이 왔다

보이는 물질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윤학 대표는 잘 웃는다.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보이는 물질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윤학 대표는 잘 웃는다.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변호사 윤학(56)의 명함에는 흰물결 출판사, 화이트홀, 화이트홀갤러리, 월간 가톨릭 다이제스트, 월간독자 Reader 대표라고 돼있다. 돈 잘 버는 변호사로 그냥 살아도 될 텐데, 오지랖도 넓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값비싼 땅에 수지타산 맞을 것 같지 않은 소규모 공연장을 만들더니, 이제는 은행 빚 수십억 원을 내서 그 옆에 또 다른 공연장을 짓고 있다. 그는 재미있다고 했다.보이는 물질의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를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알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했다. 그 재미는 어쩌면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가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으려 애쓰는 그에게 찾아온 덤일지도 모르겠다.》

○ 다른 길

1987년 초 서울 중구 서소문 배재빌딩, 윤학의 변호사 사무실은 조용했다. 새장같이 답답했던 법률사무소를 나와 독립한 지 한달. 그동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여비서 한 명과 그가 신문만 보며 작은 공간을 지켰다. 그럼에도 사건을 물어다 주는 브로커를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브로커를 쓰면 아내부터 나를 우습게 볼 거 아니에요. 브로커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남편이라고. 또, 아이한테도 나 자신한테도 떳떳하지 못하잖아요.”

그때 중년 여성 두 명이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전자오락실용 아케이드 게임기를 세운상가에서 만들던 업체 사장의 부인들이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게임보드를 불법 복제해서 게임기를 제작하다 전기용품안전관리법과 특정경제가중처벌법 위반으로 남편들이 붙잡힌 상태였다. 게다가 그들은 집행유예 중이었다.

한 부인이 “남편을 석방시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집행유예 기간에 벌어진 일인데 가능하겠습니까.” 한 달째 공치고 있던 그로서도 아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공수표를 날릴 수는 없었다. 희한하게도 이 부인은 그에게 사건을 맡겼다. 그전까지 고위직 판검사 출신의 변호사 십여 명을 찾아다녔지만 그때마다 돈을 많이 쓰면 석방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윤 변호사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이 여성은 담당 판사, 검사와 밥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거액의 돈을 주려고 했다. 그는 매번 거절했다. 대신 벌금형이 가능한지 비슷한 판례를 집중적으로 찾았다. 그의 노력과 운이 더해져 해당 업체 사장은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이 고객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소개해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손님이 늘면서 몇 달이 지나자 그는 브로커를 고용하는 동료 변호사들보다 수입이 세 배 많아졌다.

“그때 체험한 거죠. 세상이 불의하게 돌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대부분 공정하고 옳게 돌아가는구나. 백(back)이 꼭 있어야 하는 게 아니고 ‘마이 웨이’를 가면 되는구나.

돈을 벌지 못해도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는 그의 신념의 ‘길’은 과거 두 번의 경험에서 체화된 것이었다.

○ 반대의 길


전남 해남에서 한약방을 하던 아버지가 의료사고에 휘말려 옥살이까지 한 뒤 부인과 7남매를 데리고 도피하다시피 신안군 도초도로 들어간 것은 그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중학교까지 섬에서 마치고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광주로 나갔다. 그런데 살레시오 고교 입학시험 때부터 1학년 초반까지 신발을 계속 도둑맞았다. 현관 신발장에 넣어둔 새 신발이 쉬는 시간에 귀신같이 없어지기가 열 번이었다.

섬에서 떼 온 김을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러가며 팔아 생활비를 버는 어머니가 말했다. “너도 다른 사람 신발을 훔쳐서 신고 와봐라. 그렇게 요령이 없어서 세상을 어떻게 살겠니.”

1학년 봄, 윤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머니한테 너무 미안하고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았다. 이런 자신이 살아갈 길은 있을까. 그러고 있는데 퍼뜩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요령 부리며 사는 길이 있다면 그 반대의 길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요. 진짜 한번 그렇게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반대의 길’을 사는 게 쉽게 되지는 않았다. 없는 살림에 삼수를 하고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지만 그의 관심은 사법고시와는 멀었다. 1970년대 유신시대의 불평등 구조, 부자유한 개인, 인권이 종종 유린되는 사회를 그는 고민했다. 혼자서 줄담배를 피워대며 자유권, 평등권 같은 인권에 대한 책을 읽었다. 답은 보이지 않았다. 답답했다. 그러면서도 사시를 수석 으로 통과한 친구들을 보면 기가 죽었다. 사시, 행시, 외시 이른바 3시 패스를 한 대학 동기를 보고서도 기가 죽었다. ‘나는 뭔가. 인간도 아니잖아.’

이런 그를 달라지게 만든 것은 대학원 시절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었다. 1980년 ‘5월 광주’를 생생히 경험한 뒤 고시에 대한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인권이라는 추상적 개념에만 빠져서 정작 현실은 도외시했다는 반성이 일었다. 현실적인 힘도 길러야 한다는 생각에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뒤늦은 공부는 어렵고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때 서울대 어떤 교수님 책의 문장 몇 줄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살면서 추구하는 가치는 두 가지다. 하나는 경쟁가치로 내가 가지면 남이 가질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비(非)경쟁가치다. 내가 가지면 가질수록 상대방도 갖게 된다.’

눈이 확 떠졌다. 그래, 내가 가져도 네가 가질 수 있는 가치가 있다. 사랑, 평화, 음악, 예술…. 내가 즐거워서 좋은 것을 해놓으면 그것에 영감을 받아 다른 사람은 더 좋은 걸 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내가 이제 살길이 생긴 거예요. 생각을 바꾸니까 제가 갑자기 커진 느낌이에요. 남하고 아등바등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경쟁을 통해 법무부 장관이든, 검찰총장이든, 대법원장이든 해보려는 것은 ‘아이들’의 일처럼 생각됐다. 공부가 갑자기 재미있어졌다. 재미있으니 쉬워졌다. 그는 1983년 사시에 합격했다.

○ 마음의 길

2000년대 초반 어느 새벽, 잠자던 아내를 깨웠다. 전날, 가톨릭 다이제스트 잡지사 건물을 지으려고 사뒀던 땅을 임차해 2년간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차렸던 사업가가 새 제안을 했다. 5년 더 임대해주면 25억 원을 현금으로 바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받아들이는 게 이익이라고 하자 아내가 말했다. “그럼 5년 뒤부터 거기에 당신이 건물을 지어서 무슨 일을 하지? 돈이 중요해?” 답이 딱 나왔다. ‘제가 짓겠습니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그 사업가에게 보냈다. 그렇게 시작한 공연장이 내년 3월에는 두 곳으로 늘어난다. 지금의 화이트홀은 천장을 낮게 설계해 짓고 나서 보니 관객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애초에 처음 공연장을 지은 것은 사람과 물질이 아닌 가치로 만나는 접점을 더 넓히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 잡지가 있었다.

1997년 아는 가톨릭 신부님의 소개로 잡지 ‘가톨릭 다이제스트’를 인수할 무렵 그의 정신은 피폐했다. 소송을 이겨도 소송에 져도 돈 앞에서 흉해지는 고객의 모습을 보는 것은 곤욕이었다. 고급 아파트에 사는 멋지게 빼입은 중년 여성과 그의 아들이 잘못을 하고도 그에게 오히려 잡아떼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면서 그는 멍하니 사무실 창문을 바라보는 일이 늘었다. ‘머리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구나.’ 눈물이 나왔다.

그런 그에게 잡지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여주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정기구독자는 500명에 불과해 변호사로 번 돈을 집어넣어야 운영이 됐다. 광주까지 내려가 홍보를 해서 서른여덟 부 독자를 늘렸을 때 감격도 했지만 이내 수지타산을 뽑아보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는 것 아닌가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믿음은 있었어요. 세상에는 분명히 선한 마음을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움직여 줄 것이다.”

그의 믿음은 실현됐다. 긍정적인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가톨릭 다이제스트’와 ‘월간독자 Reader’는 8만 부를 발행한다. 인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돈과 권력의 힘이 얼마나 약한지, 물질보다 정신의 힘이 얼마나 퍼져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그의 정성이 고스란히 담겼다.

윤학은 변호사 업무도 1년 반 전에 다 접었다. 오래전 죽은 베토벤의 음악이 그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처럼, 그도 누구에게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의 손끝을 거쳐 나오는 잡지와 공연장의 작은 무대를 통해서.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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