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 자본주의’에서 길을 찾다]<10>‘고용 복지’에서 ‘배우는 복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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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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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취업 천국’ 덴마크, 외국인들에게도 공짜로 직업교육

《 “외국인에게도 공짜로 직업 교육을 시켜준다는 걸 알고 제가 더 놀랐습니다.” 지난달 14일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의 직업훈련센터에서 만난 튀니지 출신 무함마드 잔나비 씨. 2년 전 취업 허가를 받아 덴마크에 온 그는 현재 직업훈련센터 소개로 3개월째 외국인을 위한 덴마크어 교육 과정을 듣고 있다. 덴마크어가 능숙해지면 벌이가 더 좋은 트럭 운전사 자격증을 따서 고향의 가족을 데려오는 게 그의 꿈이다. 덴마크어 교육과정은 물론이고 트럭 운전사 자격증 취득에 드는 비용은 직업훈련센터가 부담한다. 덴마크 정부가 외국인인 그에게 이런 혜택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업훈련센터의 리스베트 폴크 팀장은 “덴마크 땅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의 취업을 도와주는 일이 최고의 복지이기 때문”이라며 “외국인이라고 해도 그가 이 나라에서 좋은 직장을 가지면 그만큼 많은 돈을 쓰고 덴마크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
구직자들이 수도 코펜하겐의 직업훈련센터에서 컴퓨터를 무료로 이용하며 구직 정보를 찾고 있다. 덴마크 내에 91개가 있는 직업훈련센터에서는 구직 훈련에 관한 모든 비용과 정보를 제공한다. 코펜하겐=하정민 기자 dew@donga.com
구직자들이 수도 코펜하겐의 직업훈련센터에서 컴퓨터를 무료로 이용하며 구직 정보를 찾고 있다. 덴마크 내에 91개가 있는 직업훈련센터에서는 구직 훈련에 관한 모든 비용과 정보를 제공한다. 코펜하겐=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로 대변되는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 정부가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혜택을 축소하면서 사실상 존폐 기로에 섰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덴마크는 직업교육과 재취업을 지원하는 ‘배우는 복지(learn-fare)’ 모델을 통해 재정 낭비를 줄이면서 고용을 늘리고 있다.

돈만 주는 ‘전통적 복지(welfare)’는 수혜자의 만족도가 낮고 도덕적 해이도 낳았다. 이후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 복지(work-fare)’가 등장했지만 극도의 경쟁사회에서 새로운 지식과 기능을 축적하지 않고는 일자리를 줘도 효과가 별로 없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다. 전문가들은 기능과 지식을 가르치고, 구직 및 전직(轉職) 활동을 지원하는 배우는 복지로 복지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 심리상담까지 구직의 모든 것을 지원


덴마크 근로자들은 해고 후 최대 4년간 실업수당을 받는다. 실업수당이 전 직장 월급의 70∼90%에 이르러 생활에 별문제가 없다. 이를 위해 덴마크 국민은 연봉의 50%에 이르는 소득세를 부담한다. 조세연구원에 따르면 덴마크의 조세부담률은 48.3%로 한국의 26.6%보다 훨씬 높다. 비슷한 복지국가인 핀란드(42.8%), 노르웨이(42.1%)보다 세금을 많이 낸다.

조세부담률이 높고 국가 재정이 탄탄하다고 해도 최대 4년간 직장이 있을 때에 비해 크게 부족하지 않은 돈을 지원한다면 ‘퍼주기’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 이에 덴마크 정부는 근로자의 평생 학습을 도와주는 직업훈련 제도를 갖추면서 제대로 직업훈련을 받고 있는지 점검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덴마크에 있는 총 91개의 직업훈련센터는 덴마크 식 배우는 복지의 핵심이다. 각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직업훈련센터는 이력서 작성, 면접 훈련, 컴퓨터 및 운전면허 등 각종 자격증 취득 교육, 구직 알선, 실직자를 위한 심리상담을 무료로 제공한다. 구직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실업 수당을 받으면서 학위를 취득할 수도 있고, 치과기공사나 제빵기능사 등 특수 직업훈련에 드는 과정도 이수할 수 있다. 모두 무료다. 말 그대로 ‘고기 낚는 법’을 가르쳐주는 셈이다.

구직 알선은 매우 구체적이다. 폴크 팀장은 “구직자와 기업의 단순 연결이 아니라 구직자의 특성, 전 직장의 임금 수준, 출퇴근 거리는 물론이고 자녀가 있는 구직자를 위해 탁아소 현황이나 양육비 보조 조건 등도 세심히 점검해 최적의 일자리를 알선해준다”고 말했다. 직업훈련센터 운영 등 덴마크 정부가 실직자의 재취업을 위해 매년 투자하는 비용은 국내총생산(GDP)의 1.5%로 한국의 3, 4배 수준에 이른다.

○ 구직활동 열의 안 보이면 실업 수당 깎아


실업수당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1주일에 한 번 이상 구직활동에 나선 사실을 입증하는 증명서를 직업훈련센터에 제출해야 한다. 3개월에 한 번은 직업훈련센터를 방문해 컨설턴트와 면담하고 구직활동 현황을 보고한다.

실직기간이 3개월 이상 되면 직업훈련센터에서 제안하는 일자리 중 반드시 한 곳에 취업해야 한다. 설사 전직 교수에게 청소부 자리를 제시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직업훈련센터의 스티븐 로달 컨설턴트는 “구직 열의를 보여주지 않으면 실업수당을 깎는다”며 “통상 실직 기간이 길어질수록 재취업률이 급격히 떨어지는데, 이런 방지 장치를 통해 실직자의 90%가 1년 안에 새 직장을 찾도록 유도한다”고 밝혔다.

○ 덴마크에서 ‘해고는 전직’, 한국에선?


정부가 의지를 갖고 직업교육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덴마크의 노동시장 유연성은 세계 최고로 높다. 복지의 천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해고가 쉬운데, 3∼6개월 전에 근로자에게 해고 예고만 하면 된다. 근속기간 9개월 이하의 생산직 노동자에게는 해고 예고도 필요 없다. 공무원도 예외가 아니다. 덴마크 고용부 산하 노동청의 얀 헨델리오비츠 선임 고문은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공무원 60명 중 20%가 최근 3개월 새 그만뒀다”고 했다.

해고가 쉬우면 근로자들의 불안감이 높아질 것 같지만 덴마크에서 해고는 ‘전직’을 의미한다. 코펜하겐 직업훈련센터에서 만난 카트리나 요한센 씨는 물류회사 구매관리부에 다니다가 한 달 전 해고 통지를 받았지만 그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은 없었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는 “이 기회에 충분히 쉬면서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아볼 생각”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이호근 전북대 교수는 “덴마크인들은 평생 6번 정도 직업을 바꾼다”며 “그들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해고 불안감은 세계에서 가장 낮을 것”이라고 했다. 탄탄한 사회안전망, 꾸준하고 지속적인 직업 훈련, 유연한 고용시장 등 ‘황금 삼각형(The Golden Triangle)’ 모델이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 기업은 경쟁력 있는 일자리 창출


해고 부담이 적은 덴마크 기업들은 장기적으로 더 경쟁력 있는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사회에 기여한다. 코펜하겐에 있는 응급구조 전문기업으로 9000명의 직원을 보유한 ‘팔크’사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2009년 초 직원 100여 명을 해고했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비슷한 규모의 신규 인력을 채용했다. 의학연구 분야에 더 많은 고급 두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팔크의 스틴 요스라르센 인사관리(HR) 담당 부사장은 “고용의 유연성이 높으면 신규 투자가 그만큼 쉽고, 이는 더 많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장난감회사 레고도 대규모 해고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바 있다. 경영난에 빠져 허덕이던 레고는 2004년 8000명의 직원 중 절반에 가까운 3500명을 해고했다. 이후 강력한 구조조정과 신제품 개발에 나선 끝에 회생에 성공해, 줄인 일자리의 대부분을 복원했다.
▼ 이론+실습 교육에 월급까지… 청년실업률 8.1% 유럽 최저 ▼
■ 독일의 ‘배우는 복지’ 아우스빌둥


직업교육이 최고의 복지라는 ‘배우는 복지’ 개념은 독일에서도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직업학교에서 기술 이론을 배우고, 기업에서 실습을 병행하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원직업교육시스템)’에는 배우는 복지 개념이 녹아 있다.

2004년 등장한 아우스빌둥은 젊은이들이 3년간 일주일에 3, 4일은 도제 계약을 한 기업의 생산 현장에서 일하고 나머지 1, 2일은 공립학교에서 수학 경영학 등 해당 기술과 관련한 이론 수업을 듣는 제도다. 직업훈련 과목은 청소, 운전 등 비교적 간단한 직종에서부터 자동차 엔지니어, 피아노 조율기사 등 전문직에 이르기까지 350종에 이른다. 직업별로 회사와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학습 내용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 해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16세 이상 젊은이 150만 명이 아우스빌둥에 참여한다.

직업훈련 비용을 정부가 부담하는 덴마크와 달리 아우스빌둥에 소요되는 돈은 독일 기업들이 낸다. 그 대신 아우스빌둥에 참여한 기업들은 다양한 세제 혜택을 받는다. 직종별로 차이가 있지만 아우스빌둥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70만∼150만 원의 월급을 받는다. 아우스빌둥에는 특히 중소기업의 참여가 활발한데, 이는 고품질의 다양한 상품을 소량 생산하는 독일 산업계의 특성을 반영한다. 지속적인 기업성장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이공계 분야의 젊은 인재 확보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아우스빌둥 덕분에 독일의 청년실업률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 4월 10.7%에 이르던 독일의 청년실업률은 지난해 11월 8.1%까지 떨어졌다.

코펜하겐=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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