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입양’ 씨앗 뿌리니 ‘사랑’이 열렸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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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여명 입양 주선하고 공부방 열어 아이들 돌보는 충남 홍성의 집배원-미용사 부부

4일 집배원 유주봉 씨(왼쪽)와 아내 전미정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공부방 아이들과 충남 홍성군 광천읍 인근의 야산인 ‘꿀꿀이봉’으로 야외 수업을 떠났다. 오토바이 뒤로 인라인스케이트를 탄 아이, 자전거를 탄 아이, 훌라후프를 손에 든 아이들이 따랐다. 홍성=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4일 집배원 유주봉 씨(왼쪽)와 아내 전미정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공부방 아이들과 충남 홍성군 광천읍 인근의 야산인 ‘꿀꿀이봉’으로 야외 수업을 떠났다. 오토바이 뒤로 인라인스케이트를 탄 아이, 자전거를 탄 아이, 훌라후프를 손에 든 아이들이 따랐다. 홍성=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어, 휴대전화가 고장 났나?”

전미정 씨(43)는 공부방의 한 아이에게 전화하기 위해 휴대전화 폴더를 열고는 당황했다.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이라는 제목으로 저장해 놓은 공부방 아이 16명의 이름과 연락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잠시 의아해했던 남편 유주봉 씨(45)와 전 씨는 막내딸 가인(가명·9)이를 불렀다.

“가인아, 혹시 네가 이 전화번호를 다 지웠니?” “응. 내가 그랬어.”

“왜 그랬어?” “…….”

가인이는 “그냥 그랬어”라며 휙 돌아섰다. ‘무언의 항의’를 한 가인이를 보고 부부는 며칠 전 일이 퍼뜩 떠올랐다.

“나 입양됐어? 나를 낳은 엄마 아빠는 왜 나를 버렸어?” 갑작스러운 가인이의 질문에 부부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띵했다. 한 번도 입양 얘기를 꺼낸 적이 없는데 아이가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얘기를 우연히 듣고 엄마 아빠에게 따져 물은 것이다.

이 부부는 4남매 중 막내인 가인이를 입양했다. 언젠가는 가인이가 진실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부부는 당황했다. 잠시 말을 못하다가 “뭔가 사정이 있었을 거야”라고만 답하고 아이를 꼭 껴안았다. 한참을 울고 난 가인이는 “그래도 난 아빠가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우고 너무 착해서 좋아”라고 말했다.

이날 이후 가인이는 입양이란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공부방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애정을 쏟는 게 심술이 나 엄마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공부방 아이들 연락처를 모두 지워 버렸던 것이다.

○ ‘왕 아빠 엄마’된 집배원 부부

필리핀에서 온 영어교사 그레첸 씨(오른쪽)가 공부방 아이들과 영어 단어 만들기 게임을 하고 있다. 홍성=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필리핀에서 온 영어교사 그레첸 씨(오른쪽)가 공부방 아이들과 영어 단어 만들기 게임을 하고 있다. 홍성=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충남 홍성군 광천읍내 대로(大路)에서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서면 골목 한 모서리에 흰색 페인트로 말끔히 단장한 2층짜리 건물이 번듯하게 서 있다. 2층 창문 바로 위에 걸린 나무패널에는 ‘지역아동지원센터 공감’이라는 스티로폼으로 만든 글자가 비스듬히 붙어 있다. 전 씨는 4일 저녁시간이 한참 이른 오후부터 학교에서 돌아올 아이들을 위한 간식과 식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전 씨의 시어머니가 직접 재배한 감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솥에서 익어 갔다. 전 씨의 식사를 돕는 사람은 전직 퇴직 교사인 한수복 씨(71).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씨는 양복 차림으로 부엌에서 쌀을 씻고 파를 다듬었다.

오후 4시 반이 넘자 아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공부방에 들어왔다. 마땅히 갈 곳이 없는 편모나 편부 슬하의 자녀, 얼굴 생김이 다른 다문화가정의 아이, 입양됐지만 엄마 아빠가 방치하다시피 하는 아이들…. 이들에게 지난해 11월 문을 연 공부방은 유일한 학원이자 놀이터다. 한밤에도 불쑥 공부방을 찾는 아이, 주말에도 갈 곳이 없으면 공부방의 초인종을 누르는 아이들에게 집배원 유 씨와 전 씨 부부는 선생님이자 아빠 엄마다.

이 부부는 1990년 충남 태안군에서 미용사와 집배원으로 만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미용 기술을 배운 전 씨는 하루 10시간 넘게 6년여를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태안군에 작은 미용실을 차렸다. 1992년 결혼 후 미용실 단골손님도 많아지고 첫아이도 생기면서 부부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들떴다. 하지만 일 욕심으로 하루 12시간도 넘게 무리해 일했던 전 씨는 관절에 이상이 왔다.

“하루 7, 8시간씩 서서 일하면 다리를 영영 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의사의 경고였다. 전 씨는 눈물을 흘리며 어렵사리 차린 미용실 문을 닫았다.

몇 개월간 집에서 쉬던 전 씨는 10여 년간 일하면서 배운 미용기술을 쓰지 않는 게 아쉬웠다. “여보, 주말에 가까운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 머리라도 깎아주고 싶어요. 미용기술을 그냥 썩히는 게 아깝잖아요.”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태안군 곳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집배원 유 씨는 아내의 제안에 흔쾌히 “그렇게 합시다”라고 동의했다. 유 씨는 주말이면 미용 장비를 싣고 차에 아내를 태우고는 운전대를 잡았다.

“머리를 깎아주고 씻길 때 우리를 쳐다보던 보육원 아이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평소 일이 아무리 피곤하고 다리가 아파도 언제부터인가 돌아오는 주말이 은근히 기다려졌죠.”

○ “입양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2003년 6월,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려 자동차 와이퍼를 빠르게 작동시켜도 뿌연 시야는 밝아지지 않았다. 입양후원기관인 동방사회복지회 건물로 들어서자 창가에 기댄 아이들이 부부를 뻔히 쳐다봤다. 건물로 들어선 부부는 한 아이를 꼭 껴안았다. 직원들이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고 만류했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뛰쳐나와 서로 안아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부부는 이곳에서 입양 절차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작성했다.

부부는 이미 3남매의 아빠 엄마였다. 아이를 하나 더 입양하겠다는 얘기를 들은 양가의 부모님들은 펄쩍 뛰었다.

“자식이 이미 셋이나 있고, 집배원 월급이 갑자기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닌데 넷이나 어떻게 키우냐. 아이들의 대학과 결혼, 그리고 미래까지 너희가 책임질 수 있니.” 시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만약 아이를 입양하면 호적에서 팔 테니 알아서 해라.”

하지만 입양은 부부가 봉사활동을 처음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꿈꿔 온 일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속옷과 배냇저고리를 싸들고 아이가 있는 서울로 갔어요.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이라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찡했습니다. 아이 셋을 모두 제왕절개로 낳았거든요. 제왕절개로 태어났다니 정말 우리 아이 같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입양 이후에도 냉랭하던 유 씨의 부모님은 입양한 아이가 백일을 맞자 금목걸이에 전 씨의 전화번호를 새겨서 보내왔다.

아이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을 무렵 한 부부가 전화를 했다. 입양을 하고 싶지만 절차도 모르고 입양기관에 혼자 갈 용기도 없다는 것이다. 몇몇 부부를 입양기관에 소개해준 뒤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금세 모임이 만들어졌다. 2005년에는 전 삼육대 교수이자 아침고요수목원 대표인 한상경 씨가 모임 소식을 듣고 후원의 뜻을 전해 왔다. 이렇게 만들어진 모임이 ‘아침고요 입양복지회’다. 1년에 한 번 4월 마지막 주에 입양 가족들이 만나 자녀교육 정보를 교환한다. 이 모임을 통해 입양된 아이만 150명을 훌쩍 넘었다.

○ ‘키다리 아저씨’도 등장하다

입양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부부의 고민도 커져 갔다.

유 씨는 “입양을 할 때는 무엇이든지 해주겠다고 결심한 부부들도 막상 몇 년 키우다 보면 지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심한 때에는 입양을 취소해서 아이에게 두 번 상처를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입양이 지속되더라도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 부모도 많았다. 하루는 입양 부모가 아이에게 한 말을 옆에서 듣고 충격을 받았다. “네 친부모가 원래 고등학교 졸업하고 너 낳은 후에 도망갔는데, 너라고 제대로 인간 노릇 하겠느냐.”

부부는 자신들이 만든 모임에서 입양된 아이들이 상처를 받고 엇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책임감을 느꼈다. 입양의 긍정적인 면만 지역사회에 알린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들었다. 고민에 빠져 있던 지난해 6월,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났다.

“5년여 전 지역 요양원인 ‘살렘동산’에서 봉사하는 댁들을 처음 봤습니다. 어려움에 처하거나 소외된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했죠. 아이들 공부방을 한번 운영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운영비는 제가 다 대겠습니다.”

지역특산물인 광천김으로 사업에 성공한 권모 회장(50)의 제안이 왔다. 권 회장은 지난해부터 지역 교회에 같이 다니다 알게 된 사이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권 회장은 오래전부터 부부를 눈여겨봐 왔던 것이다.

○ ‘지역 사랑방’으로 커가는 공감

부부는 “지역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부가 아니라 관심과 따뜻한 손길”이라는 권 회장의 뜻을 받아들였다. 권 회장은 유 씨 부부와 함께 다른 지역의 공부방을 찾아다니며 운영 방법을 배워 나갔다. 상당수 공부방 운영자와 교사들이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서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교사들이 공부방을 직장으로만 생각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정부 지원금을 받으려면 시간표에 따라 공부방을 운영해야 하고, 교사들의 출퇴근도 정해진 시간에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부부는 지원금 없이 운영하기로 했다. 유 씨는 권 회장의 도움으로 얻은 2층짜리 집 곳곳을 수리하고 꾸몄다. 건물에 붙은 ‘공감’이라는 글자도 부부가 함께 만들었다. 전 씨는 지역사회의 인맥을 동원했다. 작은 마을이지만 주변을 돌아보니 그림을 잘 그리는 엄마,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엄마, 종이접기와 조각을 잘하는 엄마를 찾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온 오후 4시 반경부터 교회의 주선으로 필리핀에서 온 선교사에게선 영어를, 지역의 ‘엄마 선생님’에게선 예체능을 배운다. 저녁을 먹은 후엔 인근 체육공원이나 산으로 가서 마음껏 뛰어논다.

공감은 이제 광천읍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만이 아니다. 낮 시간에는 다문화가정의 아내들이 찾아와 귀화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한국어와 역사를 공부한다. 전 씨에게서 요리도 배운다.

“고향에서 가져온 향신료를 요리할 때 넣는 바람에 한국인 남편들이 자신들이 만든 요리를 싫어한다는 사실도 잘 모를 때가 있어요. 그녀들에게 한국식으로 간 맞추는 법부터 된장국 미역국 끓이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금세 가정에서 칭찬을 받아요.”

활짝 웃는 전 씨의 얼굴이 해맑아 보였다.

홍성=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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