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입학사정관은 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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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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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짜고짜 항의… 근거없는 고발…가정환경 허위 작성 수험생에 배신감 느끼기도


《얼마 전 서울 한 대학의 입학처장인 A 씨는 입학처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고 당혹스러웠다. 자신을 ‘고교생’이라고 설명한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은 A 씨가 몸담고 있는 대학의 입학사정관전형에 지원한 한 학생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 학생이 자기소개서에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썼지만 실은 나와 함께 2년 동안 수학과 영어 과외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닌가. 그는 “만약 이 학생을 선발할 경우 정식으로 고발할 수밖에 없다”는 ‘협박성’ 발언과 함께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A 처장은 즉시 입학사정관들을 긴급 소집했다. 언급된 학생이 제출한 서류를 별도로 3단계에 거쳐 재차 평가한 결과 고발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내렸다. A 처장은 “근거 없는 고발전화 한 통에 모든 입학사정관에게 ‘비상’이 걸렸다.결코 웃지 못할 해프닝”이라고 말했다.》
최근 입학사정관전형을 통해 대학에 들어가려는 수험생들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학 입학처장과 입학사정관들은 전혀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겪는다. 입학사정관전형 서류평가가 한창인 요즘엔 특히 지원자에 대한 ‘고발’의 내용을 담은 익명의 전화가 한 달 새 10통 넘게 걸려오기도 한다.

1단계 합격자 발표 이후에도 이런 고난의 순간은 끝나지 않는다.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를 통해 “내 아이가 왜 서류심사에서 탈락했느냐”고 따져 묻는 학부모에게 답을 하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한다. 또 때로는 자기소개서에 거짓 내용을 써넣은 학생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학생의 자기소개서 대필이다!”…근거 없는 고발 전화 급증

입학사정관전형에 지원한 특정 학생의 이름을 대며 그의 비리(?)를 고발하는 전화는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한 대학 입학사정관은 “2, 3년 전까진 근거 없는 고발전화가 한 해 한두 건이었지만 지난해엔 10건이 넘었다”면서 “서류평가가 진행 중인 지금은 벌써 전화 서너 통이 걸려왔다”고 전했다.

익명의 전화들의 고발 사유도 다양하다. “○○○ 학생의 봉사활동은 사실 어머니가 대신했다”, “○○○ 학생의 자기소개서는 고액과외강사가 100% 대필했다”처럼 스펙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가장 많지만, “○○○ 학생은 인간성이 나쁘기 때문에 절대 합격시켜선 안 된다”는 인신공격성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대부분 대학에선 이런 익명의 전화를 통한 근거 없는 고발내용을 평가에 반영하지 않는다. 고발내용은 십중팔구 허위로 밝혀진다. 하지만 ‘만의 하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입학사정관전형에선 자기소개서나 학교생활기록부와 같은 평가서류에 담긴 내용의 진실 여부가 합격과 불합격을 가름하는 결정적 평가요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대학은 ‘1단계 서류평가 합격자 명단에 전화고발 대상자가 포함돼 있을 경우 입학사정관 전원이 참석해 서류를 재검토한다’는 내부방침을 세우기도 했다.

서울의 한 상위권 대학 입학처장인 B 씨는 “입학사정관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하는 학생이 급증하면서 일부 학생과 학부모들이 ‘친구가 대학에 먼저 합격하면 내게 돌아올 기회가 줄어들진 않을까’라는 그릇된 생각을 하면서 벌어지는 촌극 같다”고 말했다.

▶“완벽한 내 아이가 왜 불합격?”…극에 달하는 학부모 항의

입학사정관전형 1단계 서류평가 합격자가 발표되면 대학 입학처와 입학사정관들에겐 일부 학부모로부터 하루 여러 통의 항의전화가 걸려온다. 이들 학부모는 “주변에서 합격한 아이보다 내 아이의 스펙이 더 좋은데도 떨어진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겠다”면서 입학사정관전형 심사의 공정성을 문제 삼으며 다짜고짜 화를 내기도 한다.

대학 입학처로 직접 찾아와 항의하기도 한다. 지난해 서울의 한 대학 입학처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한 학부모가 자녀의 불합격 이유를 따져 물었다. 이 학부모는 입학처장인 C 씨에게 “내 아이는 ○○ 지역에서 가장 많은 교내외상을 수상했다”고 주장하며 “지원자 전체의 점수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C 처장은 해당 지원자가 어떤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지를 1시간 가까이 설명했지만 결국 학부모는 “납득할 수 없다”며 자리를 떴다.

C 처장은 “입학사정관전형은 ‘내신 1등급’처럼 눈에 뚜렷이 드러나는 점수를 정량적으로 합산하는 방식이 아니라 ‘잠재력’과 같은 요소에 대한 정성적 평가를 통해 합격 여부가 결정되다 보니 학부모의 오해와 항의가 유독 심하다”고 말했다.

▶‘역경극복사례’는 필수?…가정환경 속이는 지원자 늘어

대학 입학처장과 입학사정관들은 지원자들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2단계 면접 과정에서 일부 지원자가 자기소개서에 거짓 내용을 작성한 사실이 밝혀지는 경우가 바로 그런 순간.

특히 최근에는 가정환경을 허위로 작성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 수험생 사이에 ‘역경극복사례를 제시해야만 입학사정관전형에서 합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라는 인식이 확산된 탓이다.

실제로 지난해 서울의 한 대학 입학사정관전형 면접에서는 ‘멀쩡히’ 잘살고 있는 부모를 두고 ‘이혼했다’고 꾸며내 자기소개서를 작성한 지원자가 적발됐다. 이 학생은 자기소개서를 ‘부모가 이혼을 하는 바람에 힘들었지만 열심히 공부했다’는 취지로 작성한 것. 하지만 이 학생은 면접 때 이 대목에 대한 질문을 집중적으로 받자 “최근에 부모가 재결합해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 수정해 답하는 게 아닌가. 이를 미심쩍게 여긴 입학사정관들이 사실관계를 면밀히 살펴본 결과 해당 학생의 부모는 이혼한 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의 한 상위권대학 입학사정관인 D 씨는 “대학 입학처 관계자 사이에서는 ‘대한민국 대입 수험생 10명 중 6명은 부모가 이혼했거나, 아버지가 최근 실직했거나, 어렸을 때 치명적인 병에 걸린 경험이 있거나, 할머니가 크게 아프시다’는 마음 씁쓸한 우스갯소리가 나돌 만큼 가정환경을 속여 ‘드라마틱’한 내용을 자기소개서에 쓰는 학생이 적지 않다”면서 “학생 개개인의 주변 환경을 고려해 열정과 잠재력을 보고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입학사정관전형의 취지가 변질되고 악용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라고 토로했다.

이승태 기자 st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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