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도 계모임에서 말 좀 하자’ ‘맑은 공기는 노후에 마시자’
‘Smart is the New sexy’
수능 앞둔 고3 교실… ‘열공모드’ 급훈 아이디어 톡톡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약 50일 앞둔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교실. 끔벅끔벅 잠에 빠져들던 A 양은 고개가 꺾이려던 찰나 제풀에 흠칫 놀라 무심코 눈길을 칠판 위로 돌렸다.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재·수·없·다’는 급훈. 피식 웃은 A 양, 이내 정신이 번쩍 들더란다. 그래. ‘재수’는 없는 게 진리지. 기필코 한방에 대학을 가고 말리! A 양은 펜을 쥔 손가락에 다시 힘을 주는데….》
아는가? ‘고진감래(苦盡甘來)’처럼 고전미 넘치는 급훈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중이란 사실을. 고교 교실을 한 번 둘러보라. 칠판 주변 단아하게 걸린 네모난 액자는 진부한 풍경이건만, 그 속의 급훈만큼은 어쩌면 그리 ‘스마트’하고 창의적인지!
급훈이 ‘업그레이드’ 된 연유는 이렇다. 예전엔 담임교사가 고심을 거듭해 급훈을 짓는다 한들 학생들은 심드렁했던 것이 사실. 요즘엔 많은 학급에서 학생들이 급훈 짓기에 참여한다. 학기 초 ‘급훈 공모전’을 여는 학급도 적잖다. 그러니까, 기발한 급훈들은 대부분 고교생의 유머 본능과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어우러진 산물이란 말씀.
특히 고3 급훈은 대학 합격을 향한 절절함까지 묻어난다. 지금부터 ‘촌철살인 고3 급훈’을 유형별로 소개한다.
○ 심청이형
부모님에게 못난 성적표를 내밀기가 죄송스러운, 그러나 언젠간 꼭 부모님 기를 펴드리겠다는 고교생의 효심이 담긴 유형. ‘우리 엄마도 계모임에서 말 좀 하자’가 이에 속한다. 경남 남해제일고 3학년 1반 급훈으로, 학기 초 열린 공모전에서 당선됐다. 여기엔 이 반 정은경 양(18)의 눈물나는 사연이 담겨 있다. “엄마가 계모임을 하셔요. 어느 날 친구분이 ‘내 딸이 장학금 탔다’고 자랑하시는데 우리 엄만 묵묵히 밥만 드셨대요. 마음이 아팠죠.”
이 반 학생들은 급훈을 볼 때마다 엄마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는다고.
○ 지역형
상위권 대학은 서울에 몰려있다고 하는 지역적 특성이 드러나는 경우다. 강원 강릉여고 3학년 8반의 급훈인 ‘맑은 공기는 노후에 마시자’가 대표적. 선뜻 와 닿지 않는다면 뒤집어 생각해보라. ‘반드시 인 서울(in Seoul) 대학에 진학해 젊을 땐 탁한 서울 공기 마시며 살자’는 강원도 수험생들의 확고한 의지가 보일 것이다.
반대로 서울 사는 수험생의 불안감을 표현한 ‘2호선 탈래, KTX 탈래?’도 있다. 건국대, 서울교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한양대, 홍익대 같은 서울 소재 주요 대학들이 모인 지하철 2호선 라인을 놔두고 어찌 KTX 승차권을 끊을 수 있으리오!
그 밖에 간단명료한 급훈으로는 ‘지방탈출’ ‘이촌향도’가 눈에 띈다.
○ 현실반영형
최근 현실을 급훈에 반영한 유형으로,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가 여기에 속한다. ‘좋은 대학→번듯한 직장→높은 연봉→예쁜 마누라’로 이어지는 냉정한 현실을 반영한 급훈. ‘10분 더 공부하면 남친 차종이 바뀐다’도 비슷한 맥락이다. 요즘 ‘잘나가는’ 남자는 똑똑한 여자 찾는다는 여고생들의 현실 인식이 드러난다.
서울 대원여고 3학년 3반 급훈인 ‘Smart is the New Sexy’는 스타일리시한 광고 카피 수준. 섹시미 중에서도 최고봉은 지적인 섹시미란 것, 고교생도 안다.
○ 패러디형
대중가요 가사나 영화 제목을 따와 재치 있게 바꿔치기한 경우. 서울 동일여고 3학년 10반 급훈은 ‘나는요∼ 공부가∼ 좋은 걸∼♬’이다. 가수 아이유의 히트곡 ‘좋은 날’의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이란 가사를 패러디한 것. 급훈 공모전에서 ‘개같이 공부하고 정승같이 대학가자’라는 경쟁후보 급훈을 누르고 당선된 작품이다. 선율에 따라 입에 짝짝 달라붙는 덕에 학생들은 공부하다 힘들면 급훈을 흥얼거린다고.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비튼 ‘지금 다니러 갑니다’도 센스 만점. 물론 ‘대학에’ 다니러 간다는 뜻이다.
○ 훈계형
담임교사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유형이다. 많이 알려진 급훈은 ‘니 성적에 잠이 오냐’로, 책상에 엎드려 잘 때 선생님이 다가와 귓가에 직접 속삭이는 듯한 리얼리티가 특징. 학급에 따라선 담임교사의 커다란 사진과 함께 게시돼 있기도 하다. 좀더 카리스마 있는 버전으로는 ‘쟤 깨워라!’가 있다.
○ 언어유희형
동음이의어를 해학적으로 사용하는 식의 국어능력이 돋보이는 급훈도 있다. ‘재수 없다’가 대표적. 눈살을 찌푸릴 필요는 없다. 재수하기 싫으면 지금 공부하라는, 짧지만 명확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오분 더 공부하면 정답이 보이고 희망이 보인다.’ 서울 동일여고 3학년 5반 급훈이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담임교사의 이름인 ‘오정희’로 ‘삼행시 급훈 짓기 공모전’을 실시해 뽑힌 작품이다. 오 교사는 “매년 학기 초 내 이름으로 삼행시 급훈을 공모한다”면서 “급훈은 학생들에게 소속감을 심어주고 학급 특색을 살리는 데 좋은 도구”라고 말했다.
○ 감동형
경북 상주여고 3학년 2반 교실엔 ‘하늘을 봐!’라는 급훈이 걸려 있다. 담임인 한진 교사가 평소 “하늘을 보라”는 말을 자주 건네자 이에 감명받은 학생들이 의견을 모아 정한 것이다. 교실, 독서실, 학원에서 책만 보는 학생들을 안쓰러워하는 스승의 사랑이 물씬 배어난다. 다음은 한 교사의 말. “하늘을 보면 답답했던 기분이 풀어지고 마음이 넉넉해지잖아요. 저도 힘들 때 하늘을 보곤 했죠. 급훈을 실천해서 그런지 우리 반 아이들은 참 마음이 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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