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농촌… 힘 덜드는 작물 위주 ‘할머니 영농법’ 퍼진다

  • Array
  • 입력 2011년 6월 6일 03시 00분


코멘트

조합원 1만8000명 평균나이 67세 전남 순천농협 가보니

《 지역 평균연령 67세. 주민의 태반은 60, 70대 할머니. 50대만 돼도 ‘청년’ 소리를 듣고 70대 할머니도 ‘알바’를 뛴다. 바로 우리나라 농촌 얘기다. 지난달 1일 국내에서 가장 큰 농업협동조합(농협)이 자리한 전남 순천시를 찾았다. 순천농협을 통해 본 국내 농촌의 고령화는 이미 초고령화를 넘어 ‘슈퍼초고령화’쯤으로 넘어가 있었다. 현장에서는 농기계를 다룰 젊은이가 없어 쌀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속출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할머니를 위한’ 쉽고 편한 할머니 농법까지 개발되고 있었다. 농협이 직영하는 장례식장이 등장하고, 동네 행사마저 축구대회에서 게이트볼대회로 바뀌어 버린 농촌 고령화 현장을 둘러봤다. 》
순천농협이 운영하는 전남 순천시 유기농 쌈채 하우스에서 60대 할머니들이 상추를 따고 있다. 순천 지역에서는 일당 3만∼5만 원을 받고 상추, 오이 등을 수확하는 할머니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순천=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순천농협이 운영하는 전남 순천시 유기농 쌈채 하우스에서 60대 할머니들이 상추를 따고 있다. 순천 지역에서는 일당 3만∼5만 원을 받고 상추, 오이 등을 수확하는 할머니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순천=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전남 순천시 상사면에 사는 김순례(가명·76) 할머니의 하루는 오전 5시에 시작된다. 몇 년 전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김 할머니는 해가 뜨기 전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먹고 5시 반쯤 동네 입구로 간다. 그곳에는 친구 이순이(가명·69) 할머니가 이미 나와 있다. 두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기다린다.

바로 옆 마을에서 오이농장을 운영하는 류모 씨(60)의 트럭이다. 이들은 류 씨의 오이농장에 가서 오전 6시부터 만 12시간 동안 일당 5만 원을 받고 오이를 딴다. 이렇게 일하고 나면 밤새 어깨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지만 병원비라도 벌려면 어쩔 수 없다. 류 씨는 “요즘 농촌에서 구할 수 있는 인부는 60, 70대 할머니밖에 없다”며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인부가 없어 농사를 못 지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 늙은 농촌 “쌀농사 못 짓는다”


‘생태도시’로 이름난 순천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업지대다. 이곳 농가들이 모여 만든 순천농협의 조합원 수는 1만8000명. 전국 최대 규모다.

그런 순천농협의 올해 조합원 평균 나이는 놀랍게도 67세다. 순천농협에서 영농지도를 맡고 있는 김병도 주임(47)은 “농촌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돼 요즘은 50대 농민도 드물다”며 “특히 남성들의 수명이 짧다 보니 할머니들만 남아 일부 마을은 ‘과부촌’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고 말했다.

‘고령화·부녀화’된 순천 농가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 중 하나는 쌀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다. 김 주임은 “쌀농사를 지으려면 힘도 필요하지만 기계도 잘 다뤄야 하는데 70대 농민들에게 이런 걸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며 “조작 미숙으로 인한 경운기 전복사고나 감전사고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평균 기대수명이 80세라는 점에 비춰보면 10여 년 뒤 농작물 생산 감소, 특히 쌀 생산 감소를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내(57)와 함께 논 6612m2(약 2000평)를 빌려 쌀농사를 지었다는 홍은표 씨(64)는 “힘들고 돈도 안돼 올해부터는 쌀 대신 대파로 바꿨다. 우리뿐 아니라 대부분의 농가가 70세가 넘으면 채소 같은 힘 덜 드는 작목으로 바꾸는 추세”라고 말했다. “할 줄 아는 것이 농사밖에 없으니 앞으로 10년은 더 해야것다 생각하지만 뜻대로 될란지 모르제. 지금도 매일 병원 다니고 있응게. 분명한 건 얼마 안 가 논이고 밭이고 다 묵힐 날이 온다는 것이여.”

○ 할머니를 위한 영농법을 찾아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순천농협의 최대 역점사업은 ‘할머니들을 위한 영농법’을 개발하는 것이 됐다. 기계 없이 혼자 파종하고, 별 관리를 안 해도 힘 안 들이고 쉽게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을 찾는 것이다. 또 661∼992m2(200∼300평) 크기의 작은 비닐하우스 한두 동(棟)만 있어도 그 소득으로 먹고살 수 있는 고소득 작물을 찾는 게 관건이다. 농약 살 돈이 없을 정도로 영세한 고령 농가를 위해 비료 대신 퇴비를 활용하는 ‘저(低)투입 농법’을 개발해 권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 순천농협은 아예 60대 후반 고령농 3명의 땅을 임차해 ‘유기농 쌈채 비닐하우스’를 세웠다. 정재수 순천농협 경제사업본부 팀장은 “하우스에서 50여 종의 채소를 기르는데 당근 감자처럼 손이 많이 안 가는 작물이 인기”라며 “케일, 적상추 같은 녹즙·쌈채용 특작물도 고령화 대응전략으로 좋은 아이템”이라고 말했다. 이곳에는 한 달에 40∼80명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찾아와 친환경 영농법을 배운다.

한때 순천농협은 조합 차원에서 고령농가의 땅을 임차해 농사짓기에도 도전했다. 2007년 순천 내 7개 지역의 땅 95ha를 확보해 대규모 쌀농사 및 잡곡농사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3년 만에 실패했다. 정 팀장은 “파종과 수확은 농협이 기계로 한다 해도 항상 해야 하는 물 관리에는 ‘사람’이 필요했다”며 “땅에 대한 애착이 강한 국내 고령 농민들의 특성상 농지 임차를 연장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분석했다.

○ 비료 한 포대도 배달, 농협직영 장례식장도


이런 시행착오를 거친 순천농협은 고령농가의 농사를 주도하기보다 농사짓는 걸 돕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올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한 ‘배달 사업’이 대표적인 예다. 순천농협은 올해 3억 원을 투자해 배달 차량과 운전사를 섭외하고 영농자재와 수확 농산물을 배달·수매하고 있다.

장정훈 순천농협 교육지원팀 팀장은 “일반 비료상에 제품을 주문하면 동네 앞에 놔두고 가버리는데 힘이 달리는 노인네들이 이를 옮기지 못해 난리가 난다”며 “농협 직원만으로 민원을 소화할 수 없어 추가 인력을 고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장 팀장은 “고령농가가 요청하면 농약 한 병, 비료 한 포대까지도 직접 집이나 논까지 배달해주는 서비스가 농협 사업 중 가장 인기”라며 “수확한 농산물도 직접 가서 수매해 온다”고 덧붙였다. 13대의 차량이 매일 아침 순천 관내를 돌며 농가 수확물을 유통센터로 가져온다는 설명이다.

조합원 평균 연령이 65세를 넘어서면서 순천농협은 2007년부터 장례식장까지 직접 운영하고 있다. 순천농협 관계자는 “돌아가시는 조합원은 갈수록 느는데 노인들만 남은 농촌이라 장례 관련 사기와 촌지 민원이 많아 사업을 시작했다”며 “시중의 절반 수준 가격이라 매년 적자가 나지만 안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농촌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축구나 족구 대신 게이트볼대회가 열리는 것도 눈길 가는 변화다. 돈 없고 거동 불편한 노인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게임이 게이트볼이기 때문이다. 이광하 순천농협 조합장은 “작년에 처음으로 게이트볼대회를 열었는데 노인 150명이 선수로 참여해 호응이 높았다”며 “고령화가 농촌의 여가문화까지 바꿔 놓았다”고 평가했다.
▼ 日 ‘농촌 리더’ 키워 마을단위 영농 활성화 ▼

농촌의 초고령화와 이에 따른 농경지 감소는 일본에서도 큰 숙제다. 일본은 이미 2005년에 70세 이상 고령 농민이 40%에 육박해 한국보다 빠르고 심각한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다.

일본이 농촌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공들이는 사업은 마을별로 협업조직을 꾸리는 ‘집락(集落)영농’이다. 지역농협 등 마을단위가 하나의 법인으로서 경영 주체이자 생산자가 돼 농사를 짓는 것이다. 순천농협이 2007년부터 3년간 시도했던 것이 이와 약간 비슷했다.

집락영농은 마을단위로 영농계획을 수립하고, 가격 정보나 브랜드 마케팅에 강한 젊은이들이 구체적인 영농전략을 짠다. 또 고령 농가는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해 소득을 올린다. 일본 정부는 2008년 1만3000개 수준이던 집락영농을 2015년까지 2만∼4만 개로 늘리고 이들이 전체 농지의 70∼80%를 경영하도록 하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밝히기도 했다. 실제 일본 정부는 2009년 농지법을 개정해 농협이나 지자체가 영세농가의 땅을 쉽게 임차해 ‘규모의 영농’을 이룰 수 있도록 지원했다.

채보병 농협중앙회 경제전략팀장은 “고령농의 소규모 농지를 합쳐 대규모 경작을 하면 관리비용도 절감되고, 농지효율성도 높일 수 있어 경제적”이라고 말했다. 고령농은 힘도 자금도 없다 보니 자신의 땅에 1년에 한 번, 자기가 잘 아는 한 가지 작물만 키우지만 큰 조직이 나서 계획적인 영농을 하면 계절별, 수급별 전략을 세워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는 작물 위주로 2, 3기작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은 이 같은 전략을 통해 농산물 생산량을 유지하고 상당수의 영농승계자를 확보했다. 농협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농사를 이어받을 사람이 있다’고 답한 일본 농가의 비율은 52.9%에 이르러 3.5%에 불과한 국내에 비하면 훨씬 낫다.

한편 일본 정부는 ‘인정농업자’에 대한 경영평가를 하고 우수 농업자에게 지원을 집중하는 정책도 펼치고 있다. 인정농업자란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의 장기 농업비전을 실현할 적임자로 선정한 일종의 ‘농업 리더’를 말한다. 일본 정부는 2008년 24만 명 수준이던 인정농업자를 2015년까지 34만∼38만 명 수준으로 늘릴 계획이다.

순천=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