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삶이지만…왕년엔 잘나갔던 사장님, 이젠 동네 치킨집 사장님
난 치킨 아빠다…실패했어도 완패는 아니다, 닭 한마리에 희망 날개 달아
■ 이런 현실
《 “치킨집이죠? 프라이드 한 마리, 양념 한 마리 갖다 주세요. 되도록 빨리요. 아, 그리고 무 많이요!” “네, 알겠습니다.” 치킨집을 운영하는 중년 아저씨. 일명 ‘치킨 아빠’는 그렇게 오늘도 닭을 튀긴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한다. 자영업은 ‘명퇴(명예퇴직) 아빠’들의 탈출구, ‘중년 남성들의 인생2막’처럼 여겨지고 있다. 최근 소상공인지원센터에서 1274명(퇴직자 302명, 퇴직 예정자 97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퇴직 후 창업하겠다는 응답자는 46.3%로 나타났다. 이들 대부분은 소자본(1억 원 내외)으로 1년 안에 자신의 가게를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가장 많이 도전하는 분야는 치킨집이다. 그래서 유독 치킨집 사장들에겐 절박한 사연이 많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치킨뱅이’ 사장 강기성 씨(48)와 광주 서구 금호동 ‘쨍하고 닭 뜰 날’ 치킨집 주인 김현성 씨(47)도 그렇다. 한때 잘나갔던 시절을 뒤로하고 한 마리 치킨에 마지막 ‘희망’을 거는 이 시대 치킨 아빠들이 생애 처음으로 일기를 썼다. 》 ● 1월 13일 서울 삼성동 치킨 아빠 강기성 씨의 일기
동아일보에서 내 얘기를 듣고 싶다며 찾아왔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안 된다”고 외쳤다. 치킨집을 운영하며 열심히 살고 있지만 아직 빚을 다 갚지 못했다.
“막말로 할 게 치킨집밖에 없다”며 시작한 이 사업도 어느덧 3년째.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 생활’은 없어진 지 오래다.
나도 한때는 ‘사장님’ 소리 들으며 잘나갔다. 1983년 스무 살 때. 호텔 지배인이 되고 싶어 무작정 고향(경북 영덕)을 떠나 서울에 왔다. 주머니에 있던 돈 20만 원 중 15만 원을 내고 호텔학원에 등록했다. 나머지 5만 원으로 주린 배를 해결했다. 첫 직장인 동대문구 장안동 ‘경남관광호텔’에서 웨이터 생활을 시작한 나는 부지배인까지 올라갔다.
광주에서 치킨 아빠로 산 지 1년째인 김현성 씨는 “사업 실패 후 돌아보니 나처럼 코너에 몰려 무너진 친구들이 의외로 많았다”며 웃었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해 치킨집 이름을 ‘쨍하고 닭뜰 날’이라고 정했다”고 했다. “또 망하는 것보다 삶에 대한 ‘열정’이 식을까봐 두렵다”는 그는 매일 아들과 교환 일기를 쓰며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마흔이 되던 해, 내 사업을 시작했다. 서대문 ‘광산웨딩홀뷔페’에서 사장이 됐다. “내 자존심을 걸고 1년에 예식행사를 200건 이상 유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말 그렇게 됐다. 주말에 행사를 치르면 단 이틀에 30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바뀔 때 불행이 찾아왔다. 경기 수원시 망포동에 새 건물을 지어 사업을 확장했다. 사업이 잘돼 서대문 사업장을 팔고 수원에 ‘다걸기(올인)’했다. 그러나 1년도 안 돼 내 가게 앞에 10배 이상 큰 웨딩홀뷔페가 생겼다. 내 사업장엔 손님이 뚝 끊겼다. 2년도 안 돼 나는 사업을 정리했다. 내 앞에는 10억 원의 빚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내 나이 마흔넷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할 때 친한 형님이 마지막으로 치킨집을 해보라고 내게 1억 원을 대줬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이들 대학은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은행 대출을 받아 자본금 2억5000만 원을 만들었다. 시작과 동시에 주변 수십 개의 치킨집과 경쟁해야 했다. 전단 몇 장 뿌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치킨 몇십 마리를 튀겨 근처 사무실을 무작정 찾아갔다. 처음엔 “누구냐”고 막던 수위 아저씨들도 닭다리 한 조각에 나중엔 “자주 오라”는 말로 날 반겼다. 몸을 낮추니 단골손님도 제법 생겼다.
닭을 튀기는 내 인생은 엄밀히 말해 실패다. 하지만 아내는 지금도 나에게 “고생 좀 더 하자”며 어깨를 툭 친다. 실패한 가장. 치킨 아빠. 그래도 난 오늘도 치킨집을 향한다. 가족을 위해서.
● 1월 14일 광주 금호동 치킨 아빠 김현성 씨의 일기
1년 전 차린 내 치킨집 ‘쨍하고 닭 뜰 날’은 실은 나를 위한 주문과 같다. 아직은 하루 매출이 50만 원을 넘지 못하고, 주변 수십 개 치킨점과 경쟁해야 하지만 중요한 건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도 아픈 과거가 있다. 보험 영업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나는 1998년 PCS 이동통신사업이 뜰 무렵 우연히 휴대전화 판매대리점 운영 제안을 받았다. 보험회사를 다닌 경험으로 1년도 안 돼 1만 명에게 휴대전화를 팔았다. 사업에 ‘끼’를 확인한 나는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었다. 직원 20명과 함께 PC방 ‘인터칸’부터 삼겹살집 ‘하루돈’, 술집 ‘쪼끼쪼끼’ 등 다양한 업종에 손을 댔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 금방 포화상태가 됐다. 수익이 나지 않다 보니 회사는 ‘부실’ 상태가 됐다. 2007년 결국 모든 사업을 접어야 했다.
포기는 할 수 없었다. 업종을 차별화해 보자는 생각에 초등학교 동창과 의료기기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은 더 안 좋아졌고 빚까지 생겼다. 1년 만에 사업을 접을 때쯤 나는 수억 원의 빚을 떠안게 됐다.
2008년 쫓기듯 서울로 와 이경희 한국창업전략연구소 소장을 찾아갔다. 1년 동안 가족과 떨어진 채 연구소에서 창업 관련 수업을 들으며 프랜차이즈 사업 노하우를 익혔다. 2009년 2월 친한 선배의 도움을 받아 자본금 1억 원을 모아 지금의 치킨집을 차렸다. 자존심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치킨 브랜드는 내가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내 바람을 담아 ‘쨍하고 닭 뜰 날’로 이름을 정했다.
나는 요즘 자녀들과 ‘교환 일기’를 쓴다. 치킨집 운영하느라 새벽에 퇴근하니 아이들과 대화가 많이 부족했다. 그걸 읽으면서 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 치킨집은 내 마지막 자존심 회복이자 화목한 가정을 새로 만들겠다는 의지와도 같은 것이다.
강기성 사장님처럼 50대로 향하는 내 인생도 ‘실패’에 가깝다. 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치킨 아빠로서의 인생2막을 위해 ‘완패’라는 단어는 쓰지 않겠다. 내가 두려운 것은 치킨집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열정이 식는 것이기 때문에….
▼ “치킨-피자창업 벗어나 시야 넓히고 작은 가게라도 기업가 정신 가져야” ▼ ■ 이런 대안-전문가 조언
성공, 가족, 자존심. 이 시대 우리 아버지들의 삶을 지배하는 키워드는 이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하지만 성공과의 공존까지 직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 있다. 현재 퇴직자 4명 중 1명은 치킨, 피자 등 먹고 마시는 생활 밀접형(생계형) 창업에 몰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치킨집 창업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소상공인지원센터 통계에 따르면 동네 치킨, 피자 전문점 월평균 매출액은 1424만 원. 전체 음식업 평균(1601만 원)보다 낮은 수치다. 반면 치킨집 한 개당 경쟁업체는 7.6개로 음식점 전체 평균치 6.5개보다 많게 나타났다. 단기간 내에 무조건 성공하겠다며 치킨 아빠가 되려는 창업 현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까. 두 치킨 아빠의 문제 지적에 대해 전문가들이 대안을 제시했다.
“치킨 아빠들은 퇴직금, 전 재산을 걸어 치킨집을 차린다. 서로 경쟁만 하다 보니 1억 원 까먹는 건 문제도 아니다. 치킨집은 ‘승자 없는 게임’이다.” ―강기성 씨
△이경희 한국창업연구소 소장=‘창업=치킨, 피자 등 음식점’의 공식을 끊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시대 흐름에 맞는 새로운 창업 아이템 개발에 둔감하다. 누구나 다 하는 ‘매스 창업’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직을 활용할 수 있는 창업 아이템이나 환경 문화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 등 나만의 사업으로 승부를 걸게 해야 한다. 정부는 소액으로 차별화할 수 있는 업종을 소개해 주거나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를 이용한 마케팅 등 사업 역량도 강화시켜야 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적다. 치킨집 운영에도 전문적인 지식과 노하우가 필요한데 일부에서는 막무가내로 도전하곤 한다. 뭔가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김현성 씨
△김정윤 서울시 창업사업팀장=창업 준비자 대부분은 6개월∼1년 안에 빨리 가게를 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창업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은 18.2%에 불과하다. 문제는 교육이다. 서울시는 40세 이상을 대상으로 ‘장년창업센터’를 7월 1일부터 열 계획이다. 그동안 음식과 관계된 ‘뻔한’ 아이템을 극복하기 위해 패션, 디자인, 문화 등 그동안 잘 다루지 않았던 분야까지 교육 주제를 확장시키겠다.
“언제까지 치킨을 튀겨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때로 폭풍처럼 밀려온다.”―강기성 씨
△김진수 중앙대 창업경영대학원 교수=제일 중요한 것은 스스로 ‘기업가 정신’을 갖는 것이다. 한때 사회에서 성공했던 기억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면 자기 손해다. 뒤바뀐 ‘갑’ ‘을’ 관계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 문제는 스스로 깨치기 어렵다는 것. 창업 전 각종 창업센터 프로그램 현장 실습을 많이 다녀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우량한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자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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