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공존을 향해/2부]<2>일? 아이? 種이 다른 엄마들의 항변

  • Array
  • 입력 2011년 1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워킹맘, 시간없고 정보없고… 그렇다고 따돌리나요
전업맘, 모임 나와야 친해지죠, 애한테 관심 있나요


■ 이런 현실


은행에 다니던 허모(43) 과장은 지난해, 23년 동안 근무한 직장을 그만뒀다. 내부 평가는 나쁘지 않았지만 본인이 먼저 사직서를 써서 지점장에게 제출했다. “갑자기 웬 사표냐”며 반문하는 동료들에게 그는 차마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20년 넘게 ‘고졸’ 꼬리표를 떼기 위해 정말 일만 했어요. 엄마보다는 은행원이라는 게 우선이었죠. 그런데…. 단 한 번만이라도 ‘떳떳한’ 엄마가 돼 달라는 딸의 말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허 씨의 딸은 2009년 고교 입학 이후 “엄마가 나에게 해준 게 뭐냐”며 반발했다. ‘엄마 커뮤니티’에 끼지 못한 딸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겉돌았다. 허 씨는 “과외를 하거나 봉사활동을 가더라도 전업주부끼리만 팀을 만든다는 딸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며 “고3 한 해 동안만이라도 ‘억척맘’으로 살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학부모 사이에도 분열은 있다. 특히 아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전업주부와 자신의 일을 하는 맞벌이주부는 ‘다른 종(種)’에 가깝다.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이 전업주부 4명과 워킹맘 4명을 인터뷰해 그 내용을 대담 형식으로 구성했다. 익명을 요구한 인터뷰에서 이들은 학부모 간의 갈등과 서로에게 가지고 있던 불만을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워킹맘=같은 엄마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하는 건 민망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죠. 전업주부들이 맞벌이주부 따돌리는 문제 심각해요. 학부모 모임 나가면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죠. ‘왕따’가 이런 서러움을 느끼겠구나 싶어요.

전업맘=누가 소외시킨다는 거예요? 혼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닌가요? 게다가 애초에 모임에 나오셔야 소외를 시키죠. 우리 같은 전업주부들끼리야 학부모 모임도 나가고, 녹색어머니회도 같이하고, 학교 급식봉사도 하면서 자주 얼굴을 보니 친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워킹맘=저희는 그런 모임 귀찮아서 안 나가는 줄 아시나요? 행사라는 행사는 죄다 낮 시간에 열리니 그 정도는 이해해 주셔야죠. 그리고 집에 엄마가 없다고 아이들까지 손가락질하고 차별한다는 건 정말 이해를 못하겠네요. 예전에 서울 강남에서 애 키울 때는 너무 심했어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를 무조건 대치동 학원 보내고, 거기서 오후 11시까지 공부시키고…. 우리 아이는 그걸 안 한다고 따돌린다는 게 말이 되나요?

서울 서초구의 워킹맘인 강모 씨(37)는 “가정환경부터 파악하고 친구를 사귀게 하는 ‘대치동 엄마’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며 “심지어 학교 선생님마저도 ‘전업주부 네트워크에 끼지 않으면 아이 가르치기 쉽지 않다’고 대놓고 말해 결국 강남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D외고를 졸업한 김모 씨(26)는 “학교를 다니던 당시 아이들 여럿이 엄마가 일하던 친구 한 명에게 ‘너희 엄마는 너한테 관심 없잖아’라고 놀리며 집단 따돌림을 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맞벌이를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달리 교육 현장에서는 전업주부가 ‘월등한’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전업맘=솔직히 맞벌이 엄마들의 태도는 문제가 있죠. 돈이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이 교육이 돈만 가지고 돼요? 맞벌이 엄마들은 행사 열 번 하면 한 번 만나기도 어려워요. 심지어 급식도우미 봉사는 다른 엄마한테 ‘돈 줄 테니 대신 나가 달라’고 대놓고 말하는 경우도 많아요. 애한테 관심이 없다는 뜻 아니에요? 당연히 아이들 중에 문제아도 많아지죠. 선생님들이 애들한테 관심 많은 전업주부네 아이가 반장 되는 걸 바라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죠.

워킹맘=문제아라고 하셨나요? 저희도 직장 다니면서 점심시간 때 급식도우미 나오고, 토요일에는 애들 모임 나가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요. 그런데도 전업주부 엄마들 만나면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게 있는 느낌이에요. 지난해 아이 그룹과외 시키려고 봤는데, 엄마들끼리 친분이 없으면 그것도 못하겠더라고요. 혼자 과외를 받게 하니 심심하다고 애도 금방 그만둬 버리고. 엄마가 집에 있고 없고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저도 집에서 애만 키우고 싶어요.

취재 과정에서 만난 워킹맘들은 아이에 대해 ‘원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직장에서 일하고 집에서는 가사를 전담하면서도, 아이 교육에 신경 쓰지 못한다는 죄책감이었다. 공무원 명모 씨(40)는 “휴일에 쉬고 싶지만 아이 성적표 보면 그나마 아는 학부모들과 약속을 잡고 정보를 들으러 나간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6학년 엄마인 임모 씨(38) 역시 “가끔 일이 바쁘면 아이 시험기간이 언제인지도 놓칠 정도”라며 “가족신문 만들기나 녹색어머니회, 간식 준비 등 엄마가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전업맘=교류가 있어야 배려할 수 있죠. 지금은 교류가 없어요. 예를 들어 참관수업을 해도 직장인들은 수업 끝나면 바로 나가버리잖아요. 얼굴 맞대고 이야기할 시간도 없어요. 어떻게 공존을 말할 수 있을까요.

워킹맘=사실 녹색어머니회 같은 학교일 끝나고 차 한잔도 못 마시고 가는 건 미안해요. 엄마들 사이에서 따돌림당해서 선생님과 상담까지 한 적 있지만, 결국은 본인 마음먹기에 따른 거겠죠. 하지만 결국 아이들을 우리 모두 함께 키운다는 마음이 없으면 공존하기 힘들 것 같아요.
▼ 어느 동사무소 ‘공동육아’… 내아이처럼 ‘품앗이 육아’
동네아이들 사랑방 됐네

■ 이런 대안

서울 마포구 성산1동 무지개육아사랑방에서 고무찰흙으로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는 동네 아이들과 부모들. 지역 차원의 ‘공동 육아’가 맞벌이가정과 다문화가정, 한부모가정 등 가족 구성에 따른 차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사진 제공 마포구
서울 마포구 성산1동 무지개육아사랑방에서 고무찰흙으로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는 동네 아이들과 부모들. 지역 차원의 ‘공동 육아’가 맞벌이가정과 다문화가정, 한부모가정 등 가족 구성에 따른 차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사진 제공 마포구
지난해 12월 29일 찾아간 서울 마포구 성산1동의 ‘무지개육아사랑방’. 오후 시간임에도 어린 아이들로 쉴 새 없이 붐볐다. 58m²(약 17.5평)의 좁은 방 안에는 초등학교 입학 전 연령대의 아이 10여 명이 함께 뛰어놀고 간식을 먹었다. 한편에서는 이들을 데리고 온 엄마와 할머니, 아버지들이 아이들에게 줄 찰흙 재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이연화 씨(42)는 “동네 아이들이 많이 모여 항상 분주한 곳”이라고 무지개육아사랑방을 소개했다.

이곳은 성산1동사무소가 마련한 ‘공동 육아방’이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와서 다른 가족과 어울리고, 일이 있으면 아이를 맡기고 외출할 수도 있다. 맞벌이 가정이든 외벌이 가정이든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함께 만나는 사랑방인 셈이다.

무지개육아사랑방은 ‘시간제’로 운영된다. 주로 전업주부들이 아이와 함께 이곳을 찾지만 맞벌이 가정에서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는다. 육아를 위해서는 자신이 봉사한 탁아 시간만큼 아이를 맡길 수도 있고, 1시간에 2000원가량 비용을 낼 수도 있다. 이 씨는 “인근에 사는 사람은 물론 서대문구 홍은동이나 경기 부천에 사는 학부모까지 아이를 맡기러 아침에 오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아들 형제인 찬휘(5) 선휘 군(3)과 이곳을 찾은 전제광 씨(37)는 “원칙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봐 준 만큼 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육아방이지만 계속 드나들다 보면 모두 내 아이 같은 느낌이 든다”며 “일종의 마을 공동 육아방에 가깝게 변화된 셈”이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모두 일하러 간 김도훈 군(4)도 할머니 김순자 씨(68)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았다. 김 씨는 “늙은이 혼자 맞벌이하는 아들 내외 대신 손자와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힘들지만 이렇게 모두 모여 있으면 한결 쉽고 편하다”고 말했다. 특히 부모가 집에 없는 맞벌이가정 아이의 경우 마을 전체가 자신의 아이처럼 키우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소규모 공동육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가정 구성에 따른 학력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육아’를 공적인 영역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실제 동아일보가 한솔교육과 함께 서울 서초구와 노원구, 금천구의 초등학교 2·3학년 한 학급씩을 대상으로 조사해 본 결과 부모의 맞벌이 비율과 아이의 언어 능력은 반비례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맞벌이 비율이 가장 낮은 서초구 학교(43%)의 언어 점수가 2학년 86.7점과 3학년 72.7점을 나타낸 반면, 맞벌이 비율이 가장 높은 금천구 학교(64%)의 언어 점수는 각각 69.7점과 58점에 불과했다.

정진곤 한양대 교육학과 교수는 “맞벌이가정도 이제 일종의 교육소외가정에 가깝다”며 “부모가 힘들 경우 구청이나 동사무소, 시민단체 등 지역에 뿌리박고 있는 단체들의 ‘공동 육아’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