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30주년] 신군부 “폭도라 써라” 강요에도 본보 ‘데모시민’ 표현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14일 03시 00분


■ 5·18과 동아일보
중앙언론사 최초로 기자 파견
진실 알린 2명은 구속되기도

11일 오후 4시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묘역을 둘러보던 전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 김녕만 씨(61·월간사진예술 대표·사진)는 고 박금희 씨(당시 17세) 묘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1980년 5월 21일 여고 2학년이던 박 씨는 금남로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김 씨는 8일 후 북구 망월동 묘지 5·18희생자 합동장례식에서 딸의 영정을 안고 절규하는 박 씨 어머니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함께 울었다. 전북 고창 출신인 그는 고향보다 광주를 더 자주 찾는다.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아픈 기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17일 군사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다음 날 동아일보는 광주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중앙 언론사 가운데 가장 먼저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를 광주로 급파했다. 이후 상황이 심각해지자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대규모 취재팀을 광주로 내려 보냈다. 이미 광주 일원의 교통망이 차단돼 기자들은 걸어서 광주에 들어갔다. 기자들은 시외전화가 두절되자 검찰 전용 회선을 이용해 기사를 서울 본사에 송고했다. 5·18 취재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간 기자 2명은 광주의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유언비어 유포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 사진부에 입사한 2년차 기자였던 김 씨는 24일 광주에 도착했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협상이 결렬되기 전까지 광주는 비교적 평온했다. 27일 새벽 전남도청 인근 숙소에 있던 김 씨는 적막을 깨는 총성에 잠을 깼다. 그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금남로로 뛰쳐나갔다. 널린 시신들을 보고 울분을 느끼며 미친 듯이 사진을 찍었다.

낮 12시경 항쟁 거점인 전남도청 진압작전이 끝나자 대부분의 기자는 철수했다. 하지만 김 씨는 홀로 남아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 안은 참혹했다. 계단에 뒹굴고 있는 시신들. 포승줄에 묶여 바닥에 엎드려 있는 시민군들. 그는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꺼내자 군인 두 명이 시민군에게 총을 겨누는 포즈를 취하는 것을 보고 소름이 확 돋았다”고 회고했다.

김 씨는 29일까지 광주에서 5·18 관련 사진 1000여 장을 찍었다. 하지만 신군부의 철저한 언론 통제 때문에 당시의 항쟁 모습을 생생하게 담은 사진들을 신문에 싣지 못했다. 당시 신군부는 5·18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기사에 ‘폭도’ 등의 표현을 쓰도록 강요했으나 동아일보는 ‘일부 과격한 청년’이나 ‘데모시민’으로 표현했다. 김 씨가 찍었던 사진들은 13년이 흐른 뒤 빛을 봤다. 김 씨와 함께 광주에 파견됐던 황종건 포토데스크 대표(전 동아일보 사진부장)는 공개하지 못했던 사진을 모아 ‘광주, 그날’이라는 5·18사진집을 냈다. 김 씨는 “사진집을 내고서야 희생자에 대한 마음의 빚을 조금 갚은 것 같았다”며 “5·18이 광주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기억될 때 진정으로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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