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용사 잊지 않겠습니다]엄마의 혼절에… 함미가 올라올 때… 펜도 흔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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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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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 가슴 울린 그날 그장면
“생존 장병에 ‘살아돌아와 고맙다’ 인사하자 격려 쏟아져
취재 마음 급해 오열하는 유가족 허락없이 사진 찍어 죄송”

군항부두 지나는 운구행렬 29일 오전 경기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 안보공원에서 해군장으로 엄수된 천안함 46용사의 영결식을 마친 운구 행렬이 군항부두를 지나고 있다. 이날 운구를 위해 차량 90대가 동원됐다. 사진공동취재단
군항부두 지나는 운구행렬 29일 오전 경기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 안보공원에서 해군장으로 엄수된 천안함 46용사의 영결식을 마친 운구 행렬이 군항부두를 지나고 있다. 이날 운구를 위해 차량 90대가 동원됐다. 사진공동취재단

《‘천안함 침몰’은 사건현장을 누벼온 취재기자들도 상상하기 힘든 충격적인 사건으로 35일 동안 온 국민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칠흑 같은 바다에서 두 동강 난 천안함의 침몰 경위를 밝히기 위해 뛰었지만 아직도 속 시원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46명의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을 글로, 카메라 앵글로, 인터넷으로 독자에게 전하면서 기자들도 가슴속으로 고통을 함께 했습니다. 현장 기자들의 취재 후기(後記)를 소개합니다.》

진상규명이 남은 자들의 의무

천안함 희생자 46명의 안장이 끝난 29일 오후 9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 임시 기자실은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텅텅 비었다. 한 달 넘게 국내 모든 언론이 상주하며 취재 전쟁을 벌인 현장에서 원망스러운 서해를 향해 공허함과 허탈감을 달래 본다. 사건 첫날 유가족들의 분노에 찬 음성부터 실종자 수색을 중단한다는 가족 대표의 떨리는 목소리까지, 그리고 “모두 죽었다”는 슬픔에 찬 울먹임까지 모두 이곳에서 들었다. 이제 이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정확한 사건 진상 규명만이 천안함 가족들이 간절하게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일 것이다.

사회부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생환 장병 더 따뜻하게 감싸줘야

58명의 생존 장병과 처음 대면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사건 이후 2주일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생존 장병들이 첫 기자회견을 가진 7일. 희생자에 대한 애틋함이 강했던 만큼 생존자들에 대해선 박한 생각을 가졌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환자복 차림에 깁스에 목발을 짚고 들어서는 그들을 본 순간 그런 마음은 사라졌다. ‘사지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질문 전 그들에게 “살아 돌아와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후 많은 독자와 군인에게서 고맙다는 격려의 e메일을 받았다. 생환자들의 노고와 아픔을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사회부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지금도 코끝 찡한 UDT歌 합창

“마지막 가시는 길, 고인이 생전에 즐겨 불렀던 ‘사나이 UDT가’를 합창한 후 보내드리겠습니다. 반동 준비!” ‘UDT의 전설’ 한주호 준위의 영결식이 열린 3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고인과 30여 년을 바다에서 함께했던 문석준 중령(53)이 운구행렬을 막고 선창하자 전현직 UDT 대원들은 눈물로 UDT가를 불렀다. “우리는 사나이다/강철의 사나이….”

문 중령은 영결식장에서 UDT동지회 회원들이 UDT가를 부르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왕이면 현역인 내가 하겠다”며 지휘했다. 온 국민을 울린 사나이들의 뜨거운 눈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사회부 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아들 시신 찾았다고 축하받다니…

“동진이는 효자라 꼭 돌아올 끼다. 그래서 바로 도장 찍어줬다.” 함미가 인양되기 전 실종자가족협의회는 당시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희생 장병 44명의 가족에게 동의서를 받았다. 함수와 함미에서 시신을 찾지 못한 실종자는 산화자로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김동진 중사의 어머니 홍수향 씨(45)도 14일 도장을 찍었다. 15일 함미에서 김 중사의 시신이 35번째로 수습되자 홍 씨는 “내가 뭐라 캤노. 동진이 효자라 안 캤나”라고 말했다. 산화자 박경수 상사(29)의 사촌형 박경식 씨(36)는 “시신을 찾았다고 축하해 줍니다. 이게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라며 눈물을 삼켰다.

사회부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한결같이 곱고 성실했던 아들들

“범구야 미안해. 내가 너를 군대 보내서.” 24일 정범구 병장의 시신이 경기 수원연화장에 도착하자 어머니 신복섭 씨(48)는 운구차에 실린 아들의 관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신 씨는 “엄마가 돈이 없어서 군대에 보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먼저 보내냐”며 태극기에 싸인 관을 붙잡고 울다 실신했다. 천안함 침몰사건 희생자 상당수는 어려운 집안 출신이지만 한결같이 곱고 성실한 아들이었다. 박봉을 쪼개 동생 등록금과 어머니 병원비를 부치고 불우이웃까지 돕던 효자들의 사연을 독자들에게 전하면서 나도 모르게 노트북에 눈물을 쏟았다.

사회부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실종자 가족들 의연함에 감동

“최 기자님, 어제 같이 울어줘서 고마워요. 힘이 많이 됐어요.”

4일 새벽 천안함 한 유족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다시 한 번 코끝이 찡해졌다. 실종됐던 남기훈 원사의 시신이 3일 처음 발견되자 가족들은 인명 구조작업을 중단하고 선체 인양작업으로 전환할 것을 군에 요청했다. 수색 구조작업을 하다 순직한 한주호 준위에 이어 쌍끌이 어선이 침몰해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린 결정이었다. 이날 한 실종자 가족은 “이젠 실종자 가족이 아니라 유가족”이라며 수화기를 들고 한참을 울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접은 흐느낌에 기자도 함께 울었다.

사회부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아빠의 빈 관 옆 천진난만한 딸 아련

시신조차 찾지 못한 산화자 6명의 화장이 진행되었던 28일 수원 연화장. 강태민 상병의 관에는 배에서 나온 유품과 평소 좋아했던 게임기를 넣었다. 박경수 상사의 막내딸 가영이(7)는 아빠의 빈 관을 붙들고 오열하는 엄마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박수를 쳤다. “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보내니. 엄마 얼굴 한 번만 보고가지.” 장진선 중사(22)의 어머니는 아들의 영정을 붙들고 통곡했다. 시신을 찾은 가족들을 부러워하는 산화자 가족. 오지도 않은 자들을 보내야만 하는 산화자 가족들의 울음소리는 그 어느 가족의 사연보다 가슴이 아프다.

사회부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한주호 준위 검소한 생활에 숙연

지난달 30일 고 한주호 준위의 경남 진해 해군아파트 자택에 들어섰다. 결혼한 뒤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침대, 장롱, 식탁 등 각종 가구,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 상표(GOLDSTAR)가 붙어 있는 냉장고 등 검소함이 한눈에 들어왔다. 딸의 책상에는 ‘남들이 어디까지 했다고 해서 조급해하지 마라. 설렁설렁하는 것보다는 한 번을 봐도 꼼꼼하게 해라’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한 준위의 유족, 해군 특수전여단 수중파괴대(UDT) 동료, 후배들을 만나면서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인터뷰 내내 눈물을 쏟아내던 그들은 한 준위를 ‘참군인’이요, ‘행동하는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사회부 윤희각 기자 toto@donga.com

한 준위 사망소식에 바다가 미웠다

지난달 30일 실종자 구조현장 취재를 위해 배를 타고 백령도 바다로 나갔다. 3m 가까이 되는 파도가 칠 때마다 배 안으로 바닷물이 들이쳤다. 음력 보름이었던 이날은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커 조류 속도가 최대 5.3노트(초속 2.7m)에 달했다. 해군 관계자는 “태풍이 불 때 빌딩 옥상에서 바람을 맞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해군 특수전여단 해난구조대(SSU)와 수중파괴대(UDT) 대원들은 악조건에서도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뒤 용기포항으로 돌아왔을 때 한주호 준위 사망 소식이 들렸다. 또 다른 희생을 부른 백령도 바다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사회부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진실 밝히려는 노력이 北風일까

민군 합동조사단은 천안함 침몰의 원인을 ‘비접촉 수중폭발’로 결론 내렸다. 그럼에도 일각에선 어뢰에 의한 버블제트 공격은 미국만 보유한 최신 기술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이 제기됐고 한미 연합훈련 중 미군의 오폭 탓이라는 낭설도 나돌았다.

취재 과정에서 전문가들은 “해상 무기체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진실을 밝히려는 객관적인 노력마저 북풍(北風)으로 치부하는 일각의 세태가 안타까웠다. 한 예비역 장성은 “안보는 위협의 칼날이 목덜미에 닿기 전에는 귀찮은 것이다. 그러나 칼날이 눈에 보이면 이미 늦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치부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군 수뇌부 사고 수습과정에 실망

천안함 침몰 후 군 수뇌부가 보여준 사고 수습 과정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보고체계가 허술했던 것을 감추는 과정에서 사건 발생 시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사소한 거짓말로 의혹이 부풀어 오르자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생존 장병들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 더는 없다던 열상감시장비(TOD) 영상이 뒤늦게 나오기도 했다. 잇따른 해명은 군에 대한 신뢰의 기반을 갉아먹었다. 군은 안보를 위해 엄격하게 비밀을 유지할 수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비밀’의 커튼 뒤로 숨거나 사실을 꾸며서 둘러대면 안 된다.

정치부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현장 기록하는건 고통이자 숙명

지난달 27일 천안함 침몰 소식을 듣고 달려온 고 서대호 중사의 어머니는 “내 아들은 꼭 살아있을 겁니데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실종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이 차디찬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 오열하는 서 중사 어머니와 가족들을 향해 셔터를 눌러야 했다.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현장을 기록하는 것이 기자의 숙명! 카메라를 내려놓고 함께 울고 싶었다. 아니, 마음은 수십 번을 함께 울었다. 독자들에게 알린다는 마음만 급해 사진 찍히기를 싫어하는 가족들에게 상처를 안겨줬다. 유가족 여러분, 미안합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사진부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함미 절단면 찍을때 마음도 처참

백령도 남쪽 해안 절벽에서 차갑고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기다리길 일주일. 15일 낮 12시 11분에서야 무심한 바다는 천안함의 함미를 토해냈다. 천안함의 마지막 모습을 또렷이 담아내기 위해 쉼 없이 셔터를 눌렀다. 온전한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마주친 광경은 찢어진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만큼이나 처참했다. 여러 겹의 그물로 가렸지만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장병들의 비참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곧이어 진행된 시신 수습작업. 렌즈를 통해 죽은 자의 침묵과 산 자의 절규가 교차하는 순간을 지켜봤다. 카메라 렌즈에도 눈물이 맺혔다.

사진부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46인 사연 편집하며 가슴 아려

15일 함미가 인양됐다. ‘46인의 수병들이 우리 가슴에 귀환하는’(4월 16일자 A1면 제목) 순간이었다. 지면 회의가 열렸다. “46명 전원에 대한 추모 기사가 먼저다. 얼굴 사진은 모두 1면. 광고도 뺀다.” 실종 장병 전원의 사연을 3개 면에 걸쳐 실었다.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모두 제목으로 뽑고 싶었다. ‘따뜻한 봄 결혼식 올린다더니 차디찬 바닷속에서’ ‘어머니 수술비를 위해 모은 적금통장을 남긴 채’ ‘다음달 제대한다고 미리 소지품 부쳐놓고는’…. 46개의 검은 띠에 그들의 이름을 새겼다. 편집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편집부 박재덕 기자 stout@donga.com

온라인 근거없는 유언비어 씁쓸

천안함 침몰 원인을 두고 인터넷에는 무수한 ‘시나리오’가 떠다녔다. 근거 없는 주장들이 매체 간 주고받기 보도과정을 거쳐 그럴듯한 가설로 떠올랐다. 지난달 31일 YTN 보도에서 시작해 인터넷 매체들의 받아쓰기를 거쳐 포털 검색어 1위로 떠오른 ‘피로파괴설’이 대표적인 예다. 누군가가 악의로 퍼뜨린 유언비어가 트위터와 블로그라는 확성기를 거쳐 온라인 공간을 들쑤셔놓기도 했고, 정치색이라는 필터로 거른 ‘오보’로 누리꾼을 선동하는 매체도 있었다. 현란한 루머 속에서 단단한 팩트 찾아내기. 이것이 인터넷뉴스팀이 희생 장병들을 추모하는 방식이었다.

인터넷뉴스팀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3월26일밤 차라리 오보이길 빌어

그날 밤(3월 26일) 이후 쉴새없이 쏟아지는 기사를 처리해야 했다. 속보전쟁 속에서도 ‘차라리 오보이기를’ 바랐다. 함미 인양작업이 진행될 때는 인양 뒤의 슬픈 결과가 두려워 작업이 늦어졌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함미가 인양된 15일에는 36차례나 희생 장병의 속보를 전했다. 그때마다 신속하되 행여 확인되지 않은 보도로 놀라고 상처받는 경우가 없도록 톱기사를 업데이트했다. 누군가의 아들, 아빠, 남편이던 그들의 생전 사진을 동아닷컴에 올릴 때는 안타까움에 손이 떨렸다. 46명 용사의 이름과 사연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동아닷컴 뉴스편집팀장 허희재 sell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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