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인양]“따뜻한 봄 결혼식 올린다며 웃던 그, 끝내 찬 바닷속에서…”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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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은 지난달 26일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한 이후 20일 동안 사랑하는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애태우며 꼭 살아 돌아오길 간절히 기도하는 실종자 가족들의 애절한 사연을 기록해왔습니다. 그러나 온 국민의 기대와 달리 15일 인양된 천안함에서 그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먼저 시신으로 발견된 남기훈 김태석 상사를 포함한 46명의 수병들을 추억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를 또 한번 울립니다. 실종자가족협의회는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경우 ‘산화자’로 인정하겠다고 했지만 그들의 생사가 확인될 때까지 실종자로 표기합니다. 우리는 영웅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 김태석 상사(37)
김 상사는 세 딸의 자상한 아빠였다. 막 한글을 깨친 여섯 살배기 막내딸은 TV에서 아빠 이름이 처음 나왔을 때 신기해하며 큰 소리로 읽었다. 이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빠가 보고 싶어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부인 이수정 씨(36)는 “남편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다”며 “아이가 뉴스에 아빠 이름만 나오면 시무룩해져서 내색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김 상사는 천안함에서 근무할 때 단 한 건의 장비사고도 일으키지 않은 모범 군인이다. 1973년 경기 성남시에서 태어나 성남서고를 졸업한 그는 1993년 해군 부사관으로 임관한 뒤 지난해부터 천안함에서 근무했다. 실종자 수색을 중단하고 선체 인양에 나서자고 말했던 실종자 가족 김태원 씨가 친형이다.
■ 남기훈 상사(36)
남 상사는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 사격통제 분야 1인자로 통한다. 2006년부터 천안함의 사격통제를 담당하는 ‘사통장’으로 근무했다. 큰형이 7년 전 지병으로 숨지자 집안에서 맏형 역할도 했다. 신장병을 앓는 아버지의 병원비도, 작고한 큰형의 병원비도 혼자서 감당했다. 동생 남기만 씨(32)는 “뒷굽이 떨어진 신발을 신어 뭐라고 했지만 ‘괜찮다’며 웃던 형이 생각나 더 슬프다”고 말했다. 부인과 세 아들에게는 자상한 가장이었다. 경기 평택시 해군아파트 그의 집 거실에는 십자수가 걸려 있다. 함정에서 시간 날 때마다 한땀 한땀 직접 수를 놓아 결혼 4주년 기념으로 아내에게 선물한 자상함이 묻어난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영신에게.’
■ 문규석 상사(36)
“생의 마지막 전화였는데….” 문상사 가족들의 마음속에는 너무나 큰 후회가 남았다. 초등학교 2, 4학년 두 딸을 둔 문 상사는 출동할 때면 늘 가족사진을 보는 정 많던 가장이었다. 문 상사는 천안함 침몰사건 5분 전 딸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미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사건 후 가족들은 “생의 마지막 전화를 못 받았으니 어떡하느냐”며 오열했다. 이날 가족들은 차분히 TV로 인양 모습을 지켜봤다. 전남 구례군 출생인 문 상사는 1994년 해군 부사관 152기 전자하사로 임관한 후 다양한 함정의 전자장비를 다뤄온 해군 전자 분야의 엘리트다. 학점은행제를 통해 주경야독 끝에 정보통신공학과를 졸업했다.

■ 김경수 중사(34)
충남 서천군 출생인 김 중사는 1995년 해군 부사관 157기 음탐(음파탐지)하사로 임관 후 순천함, 서울함, 속초함 등을 거쳐 지난해 천안함 음탐장으로 부임했다. 음탐분야 전문성을 인정받은 관찰관으로 승조원들의 직별 교육에 열성을 다하기로 유명했다. 만능 스포츠맨으로도 통했다. 그는 육상 근무를 원했지만 꾸준히 배를 타왔다. 진급을 해 아내를 기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인 윤미숙 씨는 “남편이 육상근무를 원했는데 내가 ‘진급 때문에 나중에 하라’고 그랬다”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김석우 씨도 “아들이 진급을 못해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이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5세 아들과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이 있다.
■ 안경환 중사(33)
안 중사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일부러 외면했다.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사진조차 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촌동생은 “오빠가 배를 타고 나가면 연락을 잘 안했어요. 지금도 바다에 그냥 나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으신 것 같아요”라며 안타까워했다. 미니홈피에 남겨진 안 중사의 글들은 편안해보였다. 그의 미니홈피에는 해군 근무 당시 서해 하늘의 노을, 목포에서 근무할 때 탔던 배, 백령도의 촛대바위 사진이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의 미니홈피에는 ‘당신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게 하길 바란다’라고 적혀 있다. 안 중사는 해군의 유도무기 분야 엘리트로 손꼽혔다.

■ 김종헌 중사(34)
김 중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동시에 잃었다. 하지만 김 중사는 눈물을 흘릴 틈이 없었다. 그는 삼남매 중 맏이로 부모 대신 두 동생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김 중사는 동생들을 위해 대학 진학까지 포기했다.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해군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김 중사의 작은아버지 김호중 씨는 “군생활을 하면서도 동생들이 공부에 전념하게끔 뒷바라지해 기뻐했는데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더구나 김 중사는 결혼 7년 만에 어렵게 얻은 아들도 있다. 아들은 갓 돌을 지났다. 그는 2000년 부사관 능력평가 우수자로 선정되는 등 내연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검소한 생활로 동료들에게 모범 부사관으로 통했다.

■ 최정환 중사(32)
어린 딸을 마음껏 안고 싶다던 꿈이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지난해 결혼한 최 중사는 평소 석 달 된 딸을 제대로 안아주지 못했다. 여린 성격 탓이었다. 자신의 큰 손 때문에 딸이 다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그는 “딸이 크는 것을 자주 보고 싶다”며 천안함을 마지막으로 육상근무를 자원했다. 그의 큰 손은 천안함에서 ‘약손’으로 통했다. 의무장인 그는 부상을 입은 대원들을 어머니처럼 세심히 보살폈다. 2008년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를 추억하며 최 중사의 부인은 눈물을 흘렸다. “매일 남편이 탄 배 이야기만 나와서 TV는 켜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기적을 바랐어요.”

■ 민평기 중사(34)
민 중사는 행정장이면서도 전투 배치나 각종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함교와 외부갑판으로 올라가 정보영상을 촬영하는 군인으로 유명했다. 힘든 일일수록 오히려 솔선수범하는 부사관으로 통하다 보니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선배들에게는 맡은 바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하고 책임감이 남달리 강해 믿음을 주는 후배였다. 검도 유단자일 뿐만 아니라 야구, 테니스, 당구 등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 스포츠맨. 충남 부여군 출생인 그는 1997년 12월 해군 부사관 169기 행정하사로 임관한 후 제2함대 군수지원단, 조함단, 인방사 인사참모실 등을 거쳐 지난해 2월 천안함으로 부임했다. 2군지단장, 조함단장 표창을 받은 경력도 있다.

■ 정종율 중사(32)
정 중사에게는 세 살배기 아들이 있다. 그는 이번 훈련을 가기 전 미니홈피에 “우리 또 2세를 만들자”며 둘째 아이를 낳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아내에게는 결혼한 지 4년이나 지났어도 늘 ‘사랑한다’고 닭살 돋게 말하던 자상한 남편이었다. 정 중사와 함께 근무하다 전역한 전상우 씨는 “항상 수병들에게 친형처럼 너무나 잘해주셨던 분”이라며 “어려운 일이 있어도 솔선수범하고 격려해 주셨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정 중사는 침몰 사건 전 유도탄고속함(PKG)인 서후원함으로 인사 예보를 받은 상태였다. 평택 2함대사령관 표창, 기술행정학교상 등 각종 상을 받는 명단에도 수시로 이름을 올렸다.

■ 강준 중사(29)
“따뜻한 봄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행복해했는데… 결국 차가운 바닷속에 스러졌어요.” 강 중사는 해군 부사관으로 경남 진해에서 함께 근무했던 박현주 씨와 5월에 정식 결혼할 예정이었다. 강 중사는 잦은 출동 임무로 결혼식을 못 올렸음에도 매주 박 씨와 장애아동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해왔다. 하지만 결혼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사고를 당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더구나 최근 육상 근무가 결정돼 이번 출항이 마지막 해상작전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매형 김철수 씨는 “혼인신고도 마쳤는데 정작 처남이 없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강 중사는 천안함에서 보급업무를 담당했다. 강 중사 아내의 동생도 해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 박석원 중사(28)
“아들아. 네가 나오는 모습을 차마 직접 볼 수 없단다. 미안하다….” 박 중사의 아버지 박병규 씨(54)와 어머니 남상분 씨(47)는 현장에서 천안함이 인양되는 장면을 지켜볼 수 없었다. 이들은 평택에 있는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 머물렀다. 박 중사의 작은아버지 박정규 씨가 이들을 대신해 백령도에서 천안함의 인양 상황을 지켜봤다. 박 씨는 “형님이 현장에 있었다면 기절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충남 천안 출생인 박 중사는 2002년 해군 부사관 192기 병기하사로 임관 후 지난해 7월 천안함으로 부임했다. 그는 추운 밤 날씨 속에서도 함교 외부에서 근무하는 사병을 위해 따뜻한 차를 손수 타주는 등 자상한 부사관으로 알려졌다.

■ 신선준 중사(29)
신 중사는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리고 아버지 손에 컸다. 아버지 신국현 씨(59)에게 아들은 각별했다. 아들을 잃은 신 씨는 아들 생일인 2일 평택 제2함대사령부에서 “특별히 식사 1인분을 더 달라”고 해 혼자 아들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는 “능력이 됐다면 군생활하는 걸 막았을 텐데 너무 미안하다”며 “선준이를 미워할 수 있는 기억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거라도 떠올릴 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신 중사는 천안함 중사회 임원 역할을 맡아 수병들에게는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해주는 큰형 역할을 했다. 신 중사는 울산에서 출생해 2001년 해군신병 465기로 입대한 후 지난해 천안함에 부임했다.

■ 이창기 원사(실종·40)
천안함 전파탐지팀장이었던 이 원사는 동료들을 구하려다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숙연케 했다. 전파탐지팀장은 주로 함수에서 근무한다. 이 때문에 다른 전파탐지팀장 9명은 모두 생존했다. 둘째 형 이성기 씨(45)는 “후배들을 구하려고 함미에 달려갔다가 사고를 당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원사는 1999년 제1연평해전에서 속초함 전탐사로 참전해 전투유공 표창을 받는 등 ‘베테랑 해군’으로 통했다. 이 원사는 2일 준사관 선발 시험을 치를 예정이었지만 동료 하사의 아이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대신 천안함에 탔다. 천안함 함장 최원일 중령과 오랫동안 군 생활을 함께하면서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기도 했다.

■ 최한권 상사(실종·38)
죽을 고비를 넘긴 천안함 생존자들은 “밤에 조명등을 보고 살았다”며 “최 상사에게 감사한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사건 당시 함수에 있던 생존 장병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비상조명등의 불빛을 보면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최 상사의 치밀한 정비 덕분이었다. 최 상사는 천안함 전기장으로 부임한 후 완벽한 정비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기관부 장병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이 엄격하면서도 따듯한 선배로 통했다. 충남 홍성군 출생인 최 상사는 홍성고교를 졸업하고 1992년 해군 부사관 136기 전기하사로 임관한 후 참수리 339호 고속정, 전남함 등을 거쳐 지난해 2월 천안함으로 부임했다. 해군 후배들은 아직도 “최 상사 같은 부사관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 박경수 중사(실종·29)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군의 총탄을 맞고도 살아 돌아온 역전의 용사. 하지만 천안함에서 박 중사의 운명은 너무 야속했다. 그는 연평해전 당시 참수리호 보수사로 참전해 국무총리 전투유공표창을 수상했을 정도로 용맹한 군인이었다. 하지만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려 한동안 배를 타지 못하다가 이를 극복하고 다시 배에 올랐다. 어머니 이기옥 씨는 “연평해전 때도 고생했는데, 아들아. 왜 배를 탔나”라며 눈물을 흘렸다. 사촌형 박경식 씨(36)는 “경수는 진정한 대한민국 해군”이라고 말했다. 박 중사는 10년 전 혼인신고만 한 아내와 곧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었는데 사고를 당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박 중사는 유머와 밝은 표정으로 천안함 분위기 메이커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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