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노년을 꿈꾸는 ‘실버 바리스타’

  • 동아닷컴
  • 입력 2010년 3월 4일 09시 39분


‘실버바리스타’ 경력 2년차 배선이(69)
‘실버바리스타’ 경력 2년차 배선이(69)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더 젊게 살아가고 있어요. 정말 잘 배웠다 싶어요. 매일 이곳에서 일하면서 저만의 가게를 구상하고 저만의 노하우를 만들어간답니다.”

노년기에 접어들게 되면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하지만 배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해 각자 나름대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는 노인들이 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덕양노인종합복지관. 이 곳 1층에는 열 두 평 남짓한 크기의 특별한 커피점이 있다. 바로 ‘실버데이’ 1호점이다.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인 홀과 최신 잡지책들이 가지런하게 진열된 책꽂이 등 여느 커피점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였다.
주문대로 눈을 돌렸다. 빨간 빵모자, 흰색 블라우스, 목에 맨 단정한 검은 리본, 남색 유니폼을 입은 바리스타가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바리스타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활짝 웃고 있는 바리스타의 얼굴은 젊은 직원이 아닌 할머니들이었다.

“손님, 계산은 선불입니다. 지금 계산 안하면 우리가 잊어버려요(웃음).”
“네, 감사합니다.”

실버카페 ‘실버데이’에서 근무하는 바리스타들은 모두 65세 이상으로 최고령은 72세다. 실버 바리스타의 얼굴과 손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혀있다. 하지만 커피 만드는 손놀림만큼은 프로급이다. 주문이 들어오지 않는 때에도 주방 내의 청결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반평생 가사를 맡아 온 프로주부 출신들이다 보니 살림살이에서 나오는 세심함들이 커피점에서도 발휘된다.

덕양노인종합복지관은 지난 2008년 6월에 실버카페 ‘실버데이’ 1호점을 오픈했다.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초기 예상보다 매출이 좋아 지난해에는 3호선 지하철 역사 내에 2, 3호점을 잇따라 오픈했다. 다음 달에는 4호점도 오픈 예정이다. 특히 4호점은 평일에는 실버바리스타가, 주말에는 장애우와 장애우의 어머니가 2인 1조로 근무하게 된다.

그렇다면 노인들에게 더 편안하고 간소한 일도 많았을 텐데 왜 바리스타를 택했을까.
신우철 복지사업부 부장(고양시덕양노인종합복지관)은 “노인들이 바리스타 유니폼을 입고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멋있지 않냐”고 반문했다. 그는 “노인들의 일이 허드렛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싫었고 좀 더 멋진 일을 제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바리스타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초기 운영은 적지 않은 난항을 겪었다. 남을 돕는 일만 하던 사회복지사들이 커피점 창업을 하려다 보니 만만치 않았다. 또 3개월 여 동안 바리스타에 대한 이론·실기교육 등을 마친 노인들이었지만 크고 작은 실수들이 발생했다.
1호점 오픈 때부터 근무해 온 배선이(69) 씨는 “처음엔 우유 스팀이 얼마나 어렵던지. 또 따뜻한 커피 위에 생크림을 올리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고 말했다. 배 씨는 “그래도 지금은 우유 데워지는 소리만 듣고도 ‘다 됐네’ 해요. 이젠 베테랑 바리스타가 다 된 것 같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신 부장은 “사회복지사들의 커피점 운영 미숙, 노인들의 음료 제조과정 실수, 계산실수 등으로 초기운영이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지금 돌이켜 보면 다 추억”이라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실버데이’에 근무하는 실버바리스타는 각 매장마다 5명, 하루 3교대 근무로 이루어진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
실버 바리스타의 한 달 급여는 50여만 원 정도. ‘실버데이’의 음료 값이 시중 커피 값보다 1,000~2,000원 저렴한 것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돈을 받는다.
또 커피든 생과일주스든 성실히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 ‘실버데이’의 원칙이다. A등급의 커피 원두와 2~3일에 한 번씩 들어오는 신선한 과일들을 재료로 사용한다.
신 부장은 “시중에 판매되는 커피와 과일 주스 가격은 거품이 심하다. 시중가의 반 가격으로만 팔아도 이윤이 남는다. 우린 이윤을 남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재료비와 운영비를 제외한 모든 금액은 노인들의 급여로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버 바리스타들은 일한 댓가 중 일부를 사회에 기부한다. ‘실버데이’는 총 매출의 2%를 적립해 저소득 가정 청소년들에게 교복을 맞춰주는 연말행사를 지난 2009년부터 시작했다. 신 부장은 “보통 노인들이 존경받고 공경 받는 등 ‘받는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지만 노인들도 사회에 기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행사를 추진했다”며 기부 배경에 대해 밝혔다.

신 부장은 부족한 노인일자리 창출을 위해 “특허 등록된 ‘실버데이’를 가맹점 제도로 전국곳곳에 뻗어나가고 싶다”고 밝혔다. 단 “노인에 한해서만 전적인 기술 지원, 영업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다”는 것이 신 부장의 말이다.
한편 ‘실버데이’는 인도네시아의 사향고양이 배설물로 만든 ‘루왁커피’를 오는 4월에, 4호점 오픈과 함께 선보일 계획이다. ‘루왁 커피’는 배설물로 만들어졌지만 그 맛이 독특해 한 잔에 5만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 명품 커피다. 커피 전문 업체와 가격을 조율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할 계획이다.

‘실버데이’ 1호점에는 손님들의 주문이 쉽게 끊이지 않는다. 복지관 근처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동네 주민들 등이 단골손님이다.
‘오래 서있기 힘들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실버바리스타 조창윤(71·12개월 차)씨는 “손님들이 북적거릴 때가 제일 행복하고 보람있다”며 활짝 웃어 보였다.
현역 은퇴한 노인들이 부쩍 늘어난 요즘 같은 ‘노인시대’에 초콜릿이 들어간 카페 모카처럼 달콤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실버 바리스타’들이 앞으로 더 늘어나기를 기대해본다.

정주희 동아닷컴 기자 zooey@donga.com

▲[동영상] 커피 만드는 70대 노인들, 실버바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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