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양형기준 때문에… 아동性범죄 솜방망이 판결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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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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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형위 전문위원단 보고서
‘폭행 아닌 위력땐 감경 요소’
법정형보다 낮은 刑 잇따라
양형기준 무시 판결도 여전

8세 여자 어린이를 잔혹하게 성폭행한 이른바 ‘나영이 사건’으로 아동 성범죄자를 엄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던 와중에도 일선 법원에서는 잘못된 양형기준안 때문에 법정형량보다 낮은 형을 선고하는 사례가 빈번했던 사실이 대법원 양형위원회 전문위원단의 자체조사에서 확인됐다. 또 일부 재판부는 특별한 사유 없이 양형기준을 따르지 않고 낮은 형을 선고하거나, 형량결정 과정을 아예 판결문에 적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형위 전문위원단이 작성한 내부 보고서는 지난해 7월 시행된 아동 성범죄 양형기준안에서 ‘위계(僞計·사람을 속이거나 유혹하는 행위)·위력(威力·힘으로 피해자를 제압하는 행위)을 사용한 경우’를 형량 감경 사유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법적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형법과 성폭력범죄처벌법은 13세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이나 강제추행에 대해선 위계나 위력을 사용한 경우도 폭행·협박을 사용한 것과 똑같이 법정형량 이상을 선고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양형기준에 위계나 위력을 사용한 경우를 따로 감경요소로 정해놓은 것은 법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지방의 한 법원은 학교 교실과 도서관 등에서 A 양(9) 등 자신의 학급 학생 2명을 강제로 성추행한 혐의(성폭력범죄처벌법 위반)로 기소된 교사 장모 씨에게 지난해 12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장 씨의 범죄에 해당하는 법정형(징역 3년 이상)보다 낮은 형을 선고한 것. 이처럼 형이 낮아진 것은 재판부가 양형기준안에 따라 ‘폭행·협박이 아닌 위계·위력을 사용한 경우’라는 점을 들어 양형기준상의 감경구간(징역 1∼3년)을 선택한 뒤 범행 횟수가 많은 점을 감안해 최종적으로 권고형량 구간을 징역 1년∼5년 6개월(권고형량 상한선+상한선의 2분의 1+상한선의 3분의 1)로 정했기 때문이다. 잘못 만들어진 양형기준 때문에 위법한 판결이 내려진 셈이다.

양형위 보고서에 따르면 ‘나영이 사건’으로 여론이 들끓던 지난해 11, 12월에 장 씨 사건처럼 법정형보다 낮은 형을 선고받은 사례가 서울중앙지법, 대구지법, 수원지법, 대전지법 서산지원 등에서 6건이 있었다.

‘위계·위력을 사용한 경우’를 폭행·협박을 사용한 것보다 강압의 수위가 낮다고 보아 특별감경 요소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아동 성범죄의 특수성을 무시한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양형위의 한 관계자는 “판단력이 떨어지는 어린이를 유혹해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직접적인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낮은 형을 받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양형기준을 지키지 않은 채 권고형량보다 낮은 형을 선고하는 ‘고무줄’ 양형도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김모 씨는 지난해 10월 공원에서 만난 초등생 B 양(당시 11세)에게 “학교 위치를 가르쳐 달라”며 접근해 B 양을 200m가량 떨어진 학교로 데려갔다. 김 씨는 B 양에게 1만 원을 주고 환심을 산 뒤 학교 뒤편으로 끌고 가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는 등 강제 추행을 했다. 광주지법은 김 씨에게 양형기준에 따른 권고형량 범위(징역 4∼6년)보다 낮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김 씨에게 낮은 형을 선고한 이유로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고 △형사처벌을 받은 적이 없으며 △피해 회복을 위해 공탁금을 냈다고 판결문에 적었다. 그러나 재판부가 열거한 감경사유는 모두 형량구간을 벗어나는 형을 선고해서는 안 되는 일반감경 사유들이다. 형식적으로 판결문에 양형 이유를 적었을 뿐 실제로는 양형기준을 어긴 사례라는 게 양형위 보고서의 지적이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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