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8년 12월 30일 03시 02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8개월 넘게 도피중 붙잡혀 노인복지관 넘겨져
“불효 막심” 깨닫고 의무시간 채운뒤 계속 봉사
함께 봉사명령 받은 동료들도 잇달아 자원 나서
‘봉사명령’으로 봉사에 눈을 뜨게 될 줄을 그는 몰랐다. 지난해 사회봉사명령을 받은 뒤 봉사가 싫어 도피생활을 했던 김춘호(34) 씨. 마지못해 시작한 봉사에서 새 삶을 발견한 것이다.
26일 오후 서울 성북구 길음동 길음종합사회복지관 급식소에서 만난 김 씨는 앞치마에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은 채 대형 밥솥을 씻고 있었다. 주방장은 그를 소개하며 “봉사명령 기간이 끝난 뒤 불쑥 복지관에 나타났는데 이젠 저 아저씨 없으면 급식소가 안 돌아간다”며 껄껄 웃었다.
김 씨가 이 복지관을 처음 찾은 것은 10월 초. 지난해 사회봉사명령을 받고 “나 먹고살기도 바쁜데 무슨 봉사냐”며 8개월 넘게 보호관찰소 직원들을 피해 다니다 9월 검거돼 복지관으로 넘겨졌다.
억지로 시작된 의무 봉사가 즐거울 리 없었다. 김 씨는 하는 둥 마는 둥 일하며 틈만 나면 ‘짱박히는’ 천덕꾸러기였다. 하지만 식사를 마친 노인들이 건네는 “총각, 정말 고마워”라는 따뜻한 한마디가 그의 감춰진 효심을 자극했다.
2년 전 김 씨는 홀어머니를 잃었다. 봉제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며 두 형제를 키운 어머니에게 김 씨는 속만 썩이는 장남이었다.
그는 “제가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노인들을 볼 땐 생전 어머니한테 밥 한 끼 차려드리지 못한 게 한이 된다”며 “식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깃국을 담아주면서 여러 번 몰래 눈물을 훔쳤다”고 말했다.
160시간의 봉사명령 시간을 다 채운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일 김 씨는 복지관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자원봉사’였다. 어머니에게 못 다한 효도를 봉사로 대신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일주일에 5, 6차례 자원봉사를 나가면서 김 씨의 일상도 바빠졌다. 직장인 사우나에서 목욕탕관리를 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그는 오후 7시부터 이튿날 오전 7시까지 일을 한다. 한창 깊은 잠에 들어야 할 낮 4시간을 봉사에 할애하고 있다. 그는 “평소 7시간 자다가 요즘은 3시간 정도 자는데 잠까지 줄여가며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건 평생 처음”이라고 말했다.
김 씨가 봉사명령을 받고 배치된 후배 봉사자들을 설득해 일을 주도하면서 복지관 분위기도 바뀌었다. 시간만 때우다 인사도 없이 사라지던 일부 봉사자들이 정해진 봉사시간을 넘겨서도 일손을 놓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김 씨와 함께 봉사명령을 받았던 다른 봉사자들도 잇달아 자원봉사자로 변신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목욕봉사를 하는 한재호(38) 씨는 “악취가 나는 방에서 몸 성한 곳 없는 노인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걸 보면 내 삶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며 “목욕을 마친 노인들이 내 두 손을 꼭 붙잡고 방긋 웃을 땐 세상에 대한 원망이 싹 사라진다”고 전했다.
23일 의무봉사를 마친 뒤 사흘 만에 복지관을 다시 찾은 조상준(34) 씨도 “사회 어디를 가나 죄 지은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는데 봉사하는 동안에는 ‘내가 정말 소중한 사람’이란 뿌듯한 마음이 들어 그 맛에 중독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