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도둑맞은 미래

  • 입력 2008년 6월 9일 03시 01분


‘호르몬 재앙’… 인류는 과연 ‘멸종’을 피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추적한다. 이때 흩어진 증거를 찾고 연관성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추리소설의 탐정들은 사건 현장의 미세한 흔적은 물론 주민들의 인간관계나 심리적 동기들도 추적한다. 사실들을 연결하는 맥락 파악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다.

‘도둑맞은 미래’는 현대 인간의 존재 배경을 살피는 슬프고도 무서운 과학 추리물이다. 세 저자가 공동 저술한 이 책은 전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을 만든다. 내분비저해 화학물질을 연구하는 테오 콜본과 미국 내외의 환경정책에 관심을 가져온 과학자 페트 마이어가 탐정이 되었고, 환경 과학에 대한 기사를 써온 다이앤이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들의 공통 관심사는 자연 안에서 은밀히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과 인간의 삶이 맺은 관계이다. 오랫동안 광범위한 지역에서 펼쳐진 자연의 조각을 맞추기가 쉬울 리 없을 터. 망원경과 현미경을 적절히 배합한 이 책의 서술 방식은 과학적 지식들을 무리 없이 이해시켜 준다.

우려할 만한 사태의 발단은 이렇다. 1947년 미국 플로리다에서는 독수리들이 짝짓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개체 수가 감소했다. 80%의 독수리가 불임이 된 탓이다. 1950년대 말에는 영국에서 수수께끼처럼 수달이 사라졌다. 1988년 북유럽에는 몸이 반점으로 뒤덮인 바다표범들의 시체가, 1990년대 초 지중해에는 줄무늬 돌고래 시체가 해안에 떼로 밀려 왔다. 급기야 1990년에는 인간 남성의 정자 수가 1938년에 비해 반으로 줄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5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사람들은 머지않아 멸종 위기에 처해질 종이 바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

테오 콜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일급 재앙의 주범은 바로 내분비 교란 물질, 일명 ‘환경호르몬’이다. 내분비계는 생명체의 기초 대사나 생식 등 중요한 기능을 조절한다. 내분비 기관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은 혈관을 따라 돌며 신체 기능을 원활하게 한다. 예를 들어 갑상선 호르몬은 신진 대사를 활성화하고 체온을 유지시키며, 난소에서 분비하는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은 임신이 가능하게 자궁 내벽을 발달시킨다. 이 책은 “유전자는 건반이고 호르몬은 작곡이다”라고 말한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인체 설계도(유전자) 못지않게 그 발현을 조절하는 호르몬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환경호르몬은 우리 몸에 들어와 마치 진짜 호르몬인 듯 활동하는 인공 화학물질을 말한다. 호르몬과 수용기들은 마치 ‘열쇠와 자물쇠’처럼 맞아떨어지면서 생화학 활동을 시작한다. 문제는 자연에서 얻은 식물성 에스트로겐이 체내에서 분해된 후 하루 만에 배설되는 것과는 달리 환경호르몬은 화학 안정성이 높아 분해되지도, 배출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주로 뇌와 생식기의 지방층에 집중적으로 쌓이는 이 물질이 오직 축적되기만 한다는 사실은 실로 끔찍하다.

과학자들은 환경호르몬의 작용에서 경계해야 할 점은 용량이 아니라 ‘시점’이라고 말한다. 유럽에서 임신부들이 입덧을 없애기 위해 복용한 탈리도마이드는 1960년대 팔다리 없는 기형 아기들의 대량 출산을 일으켰다. 건강한 아기를 출산할 수 있다고 권장된 DES는 30여 년간 복용되었는데, 그때 태어난 아이들은 성인이 된 이후 생식기 이상으로 고통받았다. 일명 ‘호르몬 대참사’이다. 환경호르몬은 배아 발생의 특정 시점에서 작용하는데, 인간 실험을 할 수 없으니 겪고 나서 아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제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추구해야 할 복지는 사회 경제적 차원을 넘어 ‘살아남기’ 그 자체에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아니라 ‘자궁에서 무덤까지’이다. 생명의 그물망에서 상위 포식자인 인간은 여느 동물들보다 수명이 길기 때문에 이상 징후가 더디게 나타난다. 또한 그 오염의 결과는 세대를 이어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미래까지 훔쳐가는 그 어떤 변화는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진다. 과학을 비웃는 자연의 반응과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무거운 질문 앞에 지금 인류가 서 있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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