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교과서 뒤집어읽기]법정의 ‘무소유(無所有)’

  • 입력 2008년 3월 10일 02시 59분


제몫 이상의 재물 탐하는 사람… 소박한 내몫 키우는 보통사람…

무소유를 정말 배워야 할 이들은 누굴까

○ 들어가기

중고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필자들과 종교지도자, 대학교수들에게서 우리는 “현대사회는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라며 개탄하고 우려하는 목소리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물질적 가치에 매몰되어 내면적, 정신적 가치가 망각되는 현실이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인간의 내면세계 중에서도 욕망은 더럽고 저급한 것이고 버려야 마땅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접하게 되는가?

하지만 과연 정신적 가치를 향한 열정은 늘 아름다운 것일까? 물질적 가치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더럽기만 한 것일까?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법정 스님의 글 ‘무소유’ 중 일부를 읽어보자.

(전략)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이름 있는 난초(蘭草)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 왔을 때 아는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이라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나는 떨면서도 실내 온도를 높이지 않았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었다.

아차!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 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착해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유행기)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중략)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所有慾)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고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중략)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교훈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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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필자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임을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인간사가 소유에 대한 집착(소유욕) 때문에 평안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한정사가 붙어야 하지 않을까? 즉 ‘너무 많은 것’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이었다고. 또 인간사의 비극은 모든 인간의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 인간’의 ‘너무 많은 것’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초래한 것이었다고.

인간은 소위 ‘야만’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문명’을 이루었다. 이를 진보라고 한다면 이 진보는 인간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 덕택에 가능했다. 오랜 역사 동안 한시도 쉴 틈 없이 일하고 창조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분투가 없었다면 어찌 지금의 찬란한 문명이 가능했겠는가? 이들의 분투와 노력은 순전히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에 기인한 것이다. 그들의 더 풍요하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면 그러한 분투와 노력이 이루어졌겠는가? 일하는 사람들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은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온 동력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가졌던, 좀 더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욕망에 대해 우리 인류는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한다. 똑같은 논리로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아니 세계 곳곳에서 하루하루 일하며 그 결과로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욕망이 더러운 것이 아니다. ‘어떤’ 욕망이 더러운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인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을 불러오는 것이다.

사회의 통상적, 정상적 양식으로 보자. 자신의 삶을 충분히 지탱하고도 남을 재물과 권력을 지키고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혈안이 된 욕망이 더럽고 부도덕한 것이다. 그런 욕망은 필연적으로 남의 불행을 전제로 성취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은 남에게 돌아갈 몫을 은근슬쩍 자기의 몫으로 바꿔치기 해야만 채워지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이야말로 작금의 극심한 양극화와 비극적 전쟁을 야기한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더러운 욕망, 부도덕한 욕망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깨끗한 욕망, 아름다운 욕망이 존재한다. 이는 제 몫을 아는 욕망이며, 제 몫 이상은 제 몫으로 취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욕망이다. 대체로 이렇게 아름다운 욕망은 건강하게 일하며 세상을 말없이 떠받들어 온 사람들의 것이었다. 결국 일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더욱더 장려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욕망을 지나치게 억압당하고 있다. 지나치게 검소하게, 지나치게 절제하며 살도록 강요받는다. 교과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종교지도자의 설교를 통하여, 수많은 식자들의 글을 통하여. 교과서와 지도자와 지식인이 갖는 권위 자체가 얼마나 큰 권력인가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사실은 자명해진다. 무소유와 절제, 검소의 미덕으로 감화시켜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것이다. 이제 교과서는 건전하고 아름다운 욕망과 추하고 부도덕한 욕망을 구별하여야 한다. 전자는 더욱 키우고 후자는 버릴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변성관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

☞ ‘무소유’ 전문(全文)과 이에 관한 더 자세한 해설은 이지논술 홈페이지(easynonsul.com)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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