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m용 아닌 마라톤 선수로 키우세요”

  • 입력 2007년 10월 10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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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가정’ 이현정 삼성전자 상무의 자녀교육법

“엄마, 저 경제학자 될래요.”

얼마 전 이현정(48·사진)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팀 상무의 첫아들 대니얼(16)이 말했다.

컴퓨터게임에 거의 미쳐 살던 아이가 갑자기 경제학자로 꿈을 바꾼 것이다. 그러더니 아들은 거짓말처럼 컴퓨터게임을 끊었다. 고교생인 아들은 요즘 인근 대학에서 경제학 수업을 미리 수강할 정도로 경제학에 푹 빠져 있다.

아들이 컴퓨터게임에 몰두해 있는 동안 이 상무는 이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에게 컴퓨터게임에 응용할 수 있는 경제 원리들을 소개해 주며 함께 머리를 맞대고 게임 전략을 짰습니다.”

아들은 컴퓨터게임을 하는 와중에 경제학을 접했다가 아예 전공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이 상무는 “제가 좀 독특한 엄마죠”라며 웃었다.

아이가 집착을 보이는 것을 무조건 막기보다는 ‘이것을 통해 무엇을 얻게 할까’를 고민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상무 가족은 ‘다국적 가정’이다. 한국인 아내와 이스라엘 출신 남편에 아들 둘은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25년 넘게 미국에서 살던 이 상무는 2003년 초 삼성전자 최초의 여성 임원이 돼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언론에 등장하지 않던 그는 5년여 만에 처음으로 본보와 만나 글로벌시대 자녀 교육과 여성인재 관리법에 대해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놨다. 그는 시원시원한 성격답게 말도 거침없이 잘했다. 한국 사회와 기업을 날카롭게 분석한 그의 저서 ‘대한민국 진화론’(동아일보사)이 10일 발간된다.

“100m 단거리 선수가 아니라 마라톤 선수로 키우겠다.”

이 상무의 자녀 교육 제1조다. 컴퓨터게임을 막지 않는 것도, 장래 희망을 강요하지 않는 것도, 자기 용돈은 자기가 벌게 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인생의 주도권을 주고 주인의식을 키워 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대화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두서없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이론으로 무장하고 토론해야만 아이들에게 지적 자극을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아이들과 얘기할 때면 남편은 ‘마치 미국 대선후보들이 공방을 벌이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25년 전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이 상무는 장학금 하나만 믿고 가방 두 개 달랑 들고 미국에 가서 산업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굴지의 통신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있다가 ‘좀이 쑤신다’는 이유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영업사원이 됐다.

마케팅영업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은 그는 여성으로는 드물게 실리콘밸리에서 손꼽히는 벤처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돼 3000만 달러의 투자금을 유치하는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여성인재론은 확고하다. ‘짝퉁 남자’가 되지 말라는 것. 여성은 남성과의 ‘동조화 전략’보다는 ‘차별화 전략’으로 승부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은 ‘집 얘기’를 의도적으로 피합니다. ‘프로답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죠. 그러나 여성은 오히려 탈권위적이고 친가정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경쟁력 있는 글로벌 기업들이 바로 그런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니까요.”

이 상무의 가정은 정말 탈권위적인 듯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이 상무가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반면 남편은 재택 컨설턴트로 일하며 아이들 키우는 데 주력해 왔다. 공학박사인 남편은 얼마 전 미국 럿거스대 역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현재 저는 돈을 벌고 남편은 가정을 돌봅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30년 후에 뭐 먹고 살래’ 하고 물어보면 남편은 ‘오늘 저녁에 뭐 먹을까’ 하고 물어봅니다. 저희 부부는 정해진 부부의 역할에서 벗어날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저희 집은 잘 굴러갑니다. 전통적인 부부의 역할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습니다.”

이현정 상무
△1959년 광주 출생 △1982년 서울대 사범대 영어교육과 졸업 △1988년 미국 일리노이대 산업공학 박사 △1988∼2000년 벨연구소, AT&T, 루슨트테크놀로지 근무 △199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MBA) 석사 △2000∼2002년 미국 코리네트워크스 최고경영자 △2003년∼현재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팀 상무 △남편 아미르 마네(55) 씨와 2남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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