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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10월 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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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터비아(Disturbia)’는 스릴러의 거장인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1954년 작 ‘이창(Rear Window)’을 현대적으로 변주한 영화입니다.
‘이창’은 다리를 다쳐 꼼짝없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한 사진작가의 이야기입니다.
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건너편 아파트를 훔쳐보던 그는 우연히 살인사건을 목격하면서 위험천만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요.
‘디스터비아’ 역시 옆집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을 보게 된 10대 소년의 모험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은 옆집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캠코더에 담으면서 흥분된 목소리로 외칩니다.
“이건 리얼리티 쇼야.”
리얼리티 쇼.
바로 이 단어에 영화가 숨겨 놓은 핵심적인 메시지가 녹아 있습니다.》
[1] 스토리라인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뒤 문제아로 변한 고교생 ‘케일’(샤이어 라보프). 수업 중 교사를 폭행한 그는 법원으로부터 90일간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가택연금’ 판결을 받습니다. 발목에 감시 장치를 단 케일은 심심함을 달래려고 고성능 망원경으로 이웃집을 엿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새로 이사 온 이웃 소녀 ‘애슐리’에게 마음을 빼앗기죠.
그러던 어느 날, 케일은 우연히 옆집 남자 ‘터너’의 집을 살펴보다가 끔찍한 사건을 목격합니다. 터너가 한 여성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본 것이죠. 하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어머니도 경찰도 케일의 말을 전혀 믿어 주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는 옆집 남자에게 더 호감을 갖게 됩니다.
위기감을 느낀 케일은 단짝친구 ‘로니’를 끌어들입니다. 첨단 영상기기를 사용해 터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그들은 급기야 터너의 집안에 감춰진 시체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게 됩니다.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입니다. 정체가 밝혀진 터너. 그는 살인마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케일에게 달려듭니다.
[2] 핵심 콕콕 찌르기
이 영화 초반부에 슬쩍 지나가 버리지만 영화의 주된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케일이 TV를 통해 ‘치터스(Cheaters)’라는 프로그램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모습이죠.
치터스. 무슨 프로그램일까요? ‘사기꾼들’이라고 하는 우리말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배우자나 연인을 속이고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을 현장 추적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고발성 오락 프로그램입니다. 사람들을 며칠이고 미행하면서 그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방송 카메라는 급기야 바람피우는 현장을 잡아내 미국 전역의 시청자에게 낱낱이 공개하죠.
이런 프로그램들을 우리는 ‘리얼리티 쇼(reality show)’라고 부릅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일어난 현실 속 사건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 방송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 형식을 말하죠.
재미난 사실은, 리얼리티 쇼란 단어가 주인공의 대사 속에서 고스란히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옆집 아줌마는 매주 목요일 오후 4시마다 테니스 클럽에 간다는 둥, 건너편에 사는 버릇없는 꼬마 형제는 늘 야한 비디오를 보다가 엄마가 오기 직전에 감춘다는 둥…, 자신의 이웃집 관찰기를 단짝친구 로니에게 시시콜콜 늘어놓던 주인공 케일. 그는 득의양양해져서 이렇게 소리칩니다.
“와, 이건 완전히 리얼리티 쇼야!”
그렇습니다. 리얼리티 쇼. 이 영화의 키워드죠.
생각해 보세요. 옆집 남자 터너를 주인공 일행이 감시하는 과정이야말로 치터스 뺨칠 만큼 흥미진진하고 또 선정적인 리얼리티 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케일 일행은 첨단 기기를 총동원합니다. 고성능 망원경으로 옆집을 관찰하는 건 기본입니다. 무선 송신장치가 달린 캠코더를 들고 터너의 집에 숨어 들어가 내부를 촬영하기까지 합니다. 촬영된 동영상은 케일의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고스란히 저장됩니다. 또 터너의 뒤를 밟는 애슐리는 터너의 일거수일투족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뒤 발목이 묶여 집에 머무는 케일에게 실시간으로 전송하죠.
여기서 영화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드러내는데요. ‘공사(公私)가 구분되지 않는 현대인의 삶 자체가 리얼리티 쇼’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사적(私的) 영역’을 방송이라는 ‘공적(公的) 영역’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작업이 다름 아닌 리얼리티 쇼입니다. 치터스 역시 애정행각이라는 사람들의 사생활을 카메라에 몰래 담아 전국의 불특정 다수 시청자에게 사정없이 공개해 버리죠.
따지고 보면 정원의 잔디를 일주일에 두 번 깎고, 할인마트에서 삽을 사고,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성을 집으로 데려와 유혹하는 터너의 모든 행위는 그의 사생활입니다. 하지만 케일 일행은 그의 사생활을 낱낱이 촬영해 컴퓨터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스스로 만든 리얼리티 쇼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케일이 이웃집들을 엿본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만약 옆집 남자가 연쇄살인범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생각만 해도 무섭습니다. 케일은 남의 사생활을 카메라에 담는 불법행위를 자행했던 것이니까요. 이렇듯 리얼리티 쇼는 공사의 경계 자체가 무너져 가는 혼란스러운 현대인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그럼 케일은 남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우월적 지위’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언젠가는 케일 자신도 엿보기의 희생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이런 사실에 대한 강력한 암시입니다. 옆집 소녀 애슐리의 사랑을 얻게 된 케일은 그녀와 달콤한 키스를 나눕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친구인 로니가 캠코더로 몰래 찍고 있었잖아요? 그러면서 로니는 말합니다.
“와, 이거 유튜브(미국 동영상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면 최고로 인기가 있겠는데!”
그렇습니다. 첨단기기의 도움으로 엿보기가 일상화된 현대. 더는 엿보기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남의 사생활 엿보기를 만끽하던 자는 언제든 또 다른 누군가의 엿보기 대상이 될 수 있죠.
남을 훔쳐보면 즐겁다고요? 하지만 알아두세요. 그렇게 즐거워하는 당신의 모습을 또 다른 누군가가 훔쳐보고 있다는 걸….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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