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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3월 6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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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맘’이란 시가 떠올랐다. “엄마한테만은 넌 신**이야”/어차피 너는 하나님의 자식이란다/나중에 새아빠 만들어줄게/스스로 강을 만들어 물과 먹이를 나르고. 아주 순하고, 품 크고 존경의 그물을 드리울 사람/….”
호주제 폐지는 한 사람 한 사람 이곳에 살고 있음을 소중히 여기듯 그 어떤 따뜻함으로 다가왔다. 혜선과 그녀의 딸 수림의 웃음이 더욱 환하게 일렁거렸다. 여성도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지니게 된 느낌이다. 호주제 폐지는 가장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당연한 순리였다.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을 때의 후련함, 인생이 우리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기쁨에 잠시 목이 메었다. 혜선이 찬바람에 펄럭펄럭 이불을 털며 침대에 깔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초등학교 남자동창이었다. 혜선은 지난달에 이사가려고 집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부모님 계시는 고향을 생각 중이라고 말을 이었다.
“고향보다 지금 있는 곳이 나을 텐데. 부모님이 신경 쓰일 텐데.”
“그게 무슨 뜻인데.”
“나야 그렇게 생각진 않지만 부모님께서 체면이….”
혜선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이혼해 사는 걸 흠으로 여기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는 무의식적 관습이 너도 박혀있구나. 보통 미개한 사람들이 가진 틀에서 못 벗어나고 있구나.
“너 지금 어느 시대인데 그런 말을 하니? 무엇을 위한 체면인데. 세상엔 바람직한 이혼인 경우도 많다고. 이혼은 수많은 이별의 한 형태일 뿐이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 진짜 불행 아닐까. 이제 호주제가 폐지되고 성도 자기들이 알아서 쓰는 시대야.”
“그 호주제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어. 우리 고유 전통적인 제도였잖니?”
그 소리가 혜선에게는 삐걱거리는 문소리처럼 거슬렸다. 항상 핏줄이 딸린 문제는 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법이긴 하다. 무엇 하나 붙잡을 수 없는 게 우리 인생인데 그런 고통스러운 법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어쩜 진즉 사라졌어야 했다. 이 세상에 확고부동한 것이 어디 있나, 시대와 처지와 형편에 맞게 다듬고 고쳐가는 게 함께 하는 삶이 아니런가.
그는 한숨을 푹 쉬면서 다시 말을 꺼내었다.
“이혼한 여자만 좋지. 그렇지 않은 여자들에게 뭐가 좋아. 이러다 이혼공화국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 안해 봤어.”
“이혼 가정이 아닌 여자들도 좋고, 남자들도 좋지. 가장으로서의 부담감도 덜고, 곳곳에 뿌리박힌 남성우월주의가 사라지고 평등한 의식이 확실히 자리 잡혀 사는 게 더 평온할 텐데…또 이혼은 최후 최선의 선택이고 망가진 상태에서 뿌연 연기 같은 부부의 연을 이어가느니 차라리 끊고 새롭게 사는 게 더 사람다운 인생이라 여겨 온 존재를 다 걸고 쟁취한 거라고. 왜 재혼도 많은데 그걸 왜 혼인으로 따지지 않지. 재혼도 큰 걸림돌이 호주제잖아.”
혜선의 머릿속으로 갑자기 주눅 든 딸아이의 얼굴이 비집고 들어왔다.
“호주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혼 가정의 애들이야. 솔직히 애들이 무슨 죄야. 실제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대. 공부 잘 하는 애들 어머니는 공부 잘 하는 애들끼리 놀게 하는 상황이듯 다 끼리끼리 어울려야 한다면 상처는 줄지가 않아. 이곳이 그 누구든 환히 웃으며 공부하고 놀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 돼야 하잖아.”
혜선은 서둘러 인사를 마친 뒤 전화를 끊었다. 쓸데없는 얘기를 한 것은 아닌가 후회도 됐다. 법이 시행되었지만 얼마나 많은 남자의 의식이 바뀌었는지 좀 더 지나 봐야 한다. 공통의 이익을 추구해도 끝내 서로 통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혜선은 속으로 뇌까렸다.
‘이제 여자들은 더 이상 쓸데없이 터부나 경계선을 그어 상처 주는 남자들을 환영하지 않아. 아득히 먼 들판에서 봄이 오고 풀이 자라듯이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순리를 따라줄 남자를 사랑하지. 남자를 만드는 건 여자고 여자를 만드는 건 남자일 텐데 지배하려 드는 열정이 앞서 있으면 얼마나 세상을 망치는가 알아….”
행복은 벽돌을 부드러운 버터로 만드는 일이다. 그만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니 얼마나 힘든 것인가. 어떻든 인생의 쓸데없는 괴로움들은 줄여야만 한다. 그것으로 우리가 좀 더 성숙해지고 행복하다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게 아닐까. 만사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면 혼란도 정리되리라.
사랑 하나는 지나가도 우리는 삶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끝없이 그립고 외로운 존재이므로 또 다른 사랑이 나타나면 온 가슴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사람답고 행복해지려고 호주제가 폐지되었음을 잊지 말자.
병아리색 노란 블라우스. 작고 까만 방울 무늬가 싹을 틔울 듯 싱그러운 시간이다. 이제 모든 게 전보다 좋아질 시간. 조금은 쓸쓸해도 찬란할 시간….
딩동딩동하는 벨소리가 상념에 빠져 있는 혜선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던 수림이었다.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서 있었다.
“앞 동에 사는 미란이 언니가 내 이름이 박수림이라는 거야. 내가 이제부터 신수림이라고 했는데, 미란이 언니는 아니래. 이름은 바꿀 수 없는 거래. 이혼한 여자 딸들이나 바꾸는 거래. 난 그냥 내 이름 두 자만 할 거야. 난 그냥 수림이야.”
혜선은 빨리 이사해야겠다고, 부모님과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인 신현림
▼2008년 개정 민법 시행 뒤 달라질 ‘일상’▼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에 이은 민법개정안 통과로 우리생활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호주제 폐지와 친양자 제도는 2008년 시행되지만 동성동본 금혼 폐지는 법률공포 후 즉시 효력이 발생된다.》
● 호적, 부모의 이혼-재혼은 ‘비밀’
새로운 신분등록부에는 각 개인이 기준인이 된다. 본인을 기준으로 출생부터 사망까지 변동사항이 모두 기록된다. 그러나 부모의 신분변동사항은 기재되지 않아 부모의 이혼, 재혼 등의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어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불이익이 줄어든다.
여성은 결혼하더라도 자신의 신분등록부에 배우자의 인적사항이 기재될 뿐이며 자녀도 자신의 신분등록부에 부모의 인적사항이 기재된다.
족보는 문중의 가계를 기록하는 사적인 기록부이기 때문에 호주제 폐지와는 상관없이 원하는 문중은 이를 계속 기록해 보관하면 된다.
● 姓은 어머니를 따라 붙일 수도
혼인신고 때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하면 어머니 성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기재하지 않고 그냥 두면 부성원칙주의에 따라 아버지 성을 따르게 된다.
따라서 어머니 성을 따르려면 혼인신고 때 꼭 결정해야 한다. 아내가 외동이어서 대를 이어주기를 열망하는 장인이 있다면 결혼 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아버지 성 또는 어머니 성으로 쓰기로 결정되면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모두 결정된 하나의 성을 쓰게 된다.
● 재혼땐 새 아버지 姓 따라도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에 한해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 성을 변경할 수 있다. 예컨대 친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해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쓰기를 거부하는 등 자녀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라고 법원이 판단한다면 아버지, 어머니 또는 자녀의 청구에 의해 성을 바꿀 수도 있다.
재혼부부의 경우 법원 허가를 받아 자녀에게 새 아버지 성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반대로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다 친아버지가 나타나도 부모의 협의와 법원의 허가에 따라 자녀가 종전의 성과 본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 생계 같이하면 처가도 가족
가족인지 아닌지를 따질 때는 모든 사람이 기준이 된다. 배우자와 직계혈족, 형제자매는 기본적으로 가족이다. 여기에 생계를 같이하는 경우에는 사위 장인 장모 시아버지 시어머니 처남 처제 시동생 시누이까지 가족에 포함되는 것이다. 생계를 같이하는 의미는 한집에 살거나 경제적 도움을 주고받을 경우다.
● 입양해도 친생자와 똑같이
자녀를 입양할 때 자신의 성을 따르게 하고 신분등록부에도 친생자(親生子)로 기재할 수 있다. 법률상 친자녀와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다. 단 결혼한 지 3년 이상 된 부부가 입양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 2008년 개정 민법 시행 뒤 달라질 ‘일상’ | ||
| 구분 | 현행법 | 개정안 |
| 호주 승계 | 아들(손자)-딸-아내-며느리 순 | 삭제 |
| 신분등록부 | 호적 | 새로운 신분등록부 |
| 가족의 범위 | 호주의 배우자,혈족과 그 배우자 | 배우자, 직계혈족과 형제자매,생계를 같이하는 직계혈족의 배우자,배우자의 직계혈족,배우자의 형제자매 |
| 자녀의 성과 본 | 아버지 성과 본을 따름 | 원칙적으로 아버지 성과 본을 따르지만 부부가 결혼할 때 합의하면 어머니 성을 따름 |
| 재혼여성의 자녀 | 새 아버지와 살아도 성은 친아버지의 것으로 | 자녀의 복리를 위해 필요할 경우 법원의 허가를 받아 자녀의 성과 본을 바꿈 |
| 이혼가정의 자녀 | 어머니가 키워도 아버지의 호적에 남아있음 | 법원의 판단에 따라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음. 개별 신분등록부를 가짐 |
| 여성의 재혼금지기간 | 혼인관계가 종료된 날로부터 6개월간 | 삭제 |
| 친양자제도 | 없음 | 양자를 양부모의 친생자로 신분등록부에 기재, 양부모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음 |
| 동성동본금혼 | 동성동본인 혈족 등 | 8촌 이내의 혈족 등 |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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