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KAIST 사립화案 제시 로버트 로플린 총장

  • 입력 2005년 1월 25일 17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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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로플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은 “KAIST가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채택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부에 대한 재정 의존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로버트 로플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은 “KAIST가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채택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부에 대한 재정 의존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 두뇌들이 모여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들이 요즘 고민에 휩싸여 있다. 어려운 수학공식을 푸는 것보다 좀 더 복잡한 고민이다. 바로 KAIST의 정체성과 방향 설정에 관한 문제다. 고민의 화두를 던진 사람은 로버트 로플린 총장(55). 그는 지난해 12월 중순 300여 명의 교직원이 참석한 워크숍에서 KAIST 사립화 방안을 내놓았다. ‘로플린 구상’으로 불리는 이 방안은 △학부에 의학 법학 경영대학원 예비반을 신설하고 △학·석·박사를 합쳐 7000명 수준인 입학정원을 2만 명으로 확대하며 △학생 1인당 연간 600만 원 정도(현재 80만 원 수준)의 등록금을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학부중심 종합대 변신 목표

대학원 연구 중심으로 운영되는 이공계 국립대 KAIST를 사립화해서 학부 중심의 종합대학으로 변모시키겠다는 그의 계획은 즉각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학교 특성을 무시한 경제논리’라는 비판적인 견해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교수들이 집단적으로 총장에게 반대 의견서를 제출하고 기획처장이 보직을 사퇴하는 등 교내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무한경쟁시대에 KAIST도 예외일 수 없다’는 찬성론도 만만찮다.

지난해 7월 ‘노벨상 수상자 출신 총장’이라는 화려한 조명 속에 취임한 지 반 년 만에 논란의 한가운데에 선 로플린 총장을 21일 만났다. 우선 ‘이공계 위기’에 대한 그의 인식부터 물었다.

로버트 로플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은 대전 KAIST 캠퍼스 내의 총장관사에서 집무실까지 매일 자전거로 출근하고 주말이면 갑천 둔치에서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 사진 제공 KAIST

―KAIST의 한 교수는 ‘로플린 구상’에 대해 ‘고사 직전인 한국 축구를 살리려고 거스 히딩크 감독을 모셔왔더니 야구나 미식축구가 더 인기 있으니 종목을 바꾸자는 논리’라며 반박했습니다. ‘이공계 살리기’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상황에서 KAIST를 종합대학화하겠다는 구상은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요.

“한국에 와서 이공계 위기를 ‘사회적 실패’로 보는 분위기에 매우 놀랐습니다. 한국에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각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도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입니다. 서비스 중심의 탈(脫)산업사회로 나가면서 이공계 학문은 위축되고 이공계 전문가는 공급과잉 현상을 겪기 마련이죠. 이런 상황에서 KAIST와 같은 이공계 연구대학의 개혁은 시장에 민감하도록 체질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가 인터뷰하는 동안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시장’과 ‘이윤 창출’. 교육의 공적 기능을 중시하는 한국적 정서에서 듣자면 다소 껄끄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도 시장 동력에 반응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유능한 인재를 이공계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교육시장의 소비자인 학부모와 학생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공대 중심에서 벗어나 인문사회과학계열의 학부 과정을 강화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그가 추구하는 KAIST의 미래형 모델이다.

―그렇지만 대중적 인기와 별개로 KAIST처럼 창의적 연구 인력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여전히 필요한 것은 사실 아닌가요.

“정부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대학은 창의적 연구 인력을 만들어내기 힘듭니다. 현재 KAIST 전체 예산에서 학생 등록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5%도 안돼요. 나머지는 정부 지원금과 정부·기업 연구 프로젝트비로 충당되죠. 재정 자립 기반이 마련되지 않으면 학생과 교수들은 신명나게 연구할 수 없습니다. ‘피고용인 정신’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KAIST 사립화가 ‘교육의 질 향상’이라는 선순환 구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 건가요.

“이윤 창출은 이공계 교수와 학생의 연구 의욕을 고취하는 중요한 인센티브가 될 수 있습니다. MIT, 스탠퍼드 등 이공계 프로그램이 발달한 미국 대학에서는 ‘이윤 윤리’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공계 대학은 돈과 연구의 상업적 효과를 논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분위기입니다. 이는 결국 세계적인 대학들과의 경쟁을 어렵게 하고 과학기술의 도약을 가로막는 요인입니다.”

○ KAIST 학생-교수수준 세계 최상위권

―KAIST가 등록금을 받는 종합대학으로 변신했다고 치고, 그 경우 서울대와 비교해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까. 지금도 KAIST는 무시험 전형의 혜택에도 불구하고 의대를 지망하는 과학고 인재들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요.

“대학 내부에서 ‘자칫 지방종합대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KAIST의 실력과 잠재력에 대해 자신이 없다는 것인가요? 물론 사립화할 경우 지금보다 훨씬 혹독한 경쟁체제에 내몰릴 겁니다. 그러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훨씬 의미 있는 일입니다.”

대통령도 ‘대학은 산업’이라고 말할 정도로 교육의 시장논리가 강조되고 있다. ‘로플린 구상’과 상응하는 기류가 한국 사회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한국적 현실을 도외시한 발상’이라는 비난이 지배적이다. 그는 이런 비난을 예상했을까.

“물론 반발에 부닥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KAIST 학생과 교수의 수준이 세계 최상위권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런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직적 측면에서 KAIST는 개선의 여지가 많아요. 최고 수준의 학생과 교수를 보유하고도 국내외의 평가가 하락하는 것은 조직의 문제 때문입니다. 나는 KAIST 조직을 변화시켜 학생과 교수들이 능력을 인정받는 국제인으로 성장하는 데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내가 택한 조직개혁 방안이 바로 사립화인 것입니다.”

정부 지원의 ‘이공계 살리기’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이공계 출신들이 연구직으로 진출할 생각만 하지 말고 경영, 금융, 벤처로도 가서 돈을 벌라는 그의 주장은 ‘과학입국’을 신봉하는 한국적 사고방식에서 볼 때 일대 파격이다. 하지만 그는 “과학기술이 경제기적을 이뤄냈다는 한국인들의 믿음은 ‘신화’일 뿐”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비용’을 외면한 이공계 집중투자는 경제에 부담을 주고 시장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그가 제기한 ‘KAIST 개혁방안’이 옳은 방향인지 그른 방향인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하겠지만 변화의 필요성을 일깨운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의 일상은 격한 논쟁을 촉발한 진원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하다. 최근 그는 올가을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 출간할 예정인 자신의 저서 ‘또 다른 우주(The Different Universe)’에 수록될 삽화를 직접 그리는 작업을 마쳤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메가톤급 ‘KAIST 폭풍’은 좀처럼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찬반 입장차가 너무 커서 의견 조율이 쉽지 않은 가운데 사립화 방안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경영 경험이 전무한 그가 견디지 못하고 도중하차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구상이 실현되지 못할 경우의 진퇴를 생각해 봤는지 물었다. 그가 웃으며 대답한다. “계속하느냐 마느냐, 그건 제가 풀어야 하는 문제겠죠.”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로플린 총장은▼

△1950년=미국 캘리포니아 주 비세일리 아 출생

△1972년=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수학과 졸업

△1979년=MIT대 물리학 박사

△1985∼2003년=스탠퍼드대 응용물리 학과 교수, 92년 석좌교수

△1985년=로렌스 물리학상 수상

△1997년=프랭클린 물리메달 수상

△1997년=노벨 물리학상 수상

△2004년 7월=KAIST 총장 취임

△가족=부인 아니타 씨와 2남

△취미=작곡, 피아노 연주, 자전거 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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