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까지 오라하고 '퇴짜'라니?"(전문)

  • 입력 2005년 1월 2일 11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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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까지 오라하고 '퇴짜'라니?"

[어느 총각의 101번 맞선기](1)여선생과 노총각

"기대를 허망함으로 바꿔놓은 발렌타인데이"

내 나이 32. 젊다면 젊고, 노총각이라면 노총각인 나이.

하지만 누가 노총각이라고 부를라 치면 입에 거품을 물며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댄데...32살이 노총각에요...결혼적령기지. 시대에 뒤떨어지는 얘기 좀 하지 마세요” 라며 박박 우겨댄다. 안다. 나도 이러면 이럴수록 내가 더 비참해 지는 것을. TV에서 올겨울 들어 첫 눈이 내렸다느니, 최저기온을 기록했다는 뉴스가 빈번해 진 것으로 봐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특히 12월 달력 달랑 한 장 남겨진 이 시점이 솔로들을 가장 힘들게 한다. 특히, 발렌타인데이다, 화이트 데이다, 로즈데이, 키스데이 뭐 이런 잡다한 날이 다가오면 말로는 “야. 그거다 상술이야. 뭐 그런 걸 신경 써”라고 말은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내 모습이 한없이 처량해 보이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솔로들 대부분이 느끼는 공통 상황일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소개팅이라면 소개팅, 맞선이라면 맞선, 솔직히 100번 조금 안되게 해봤다. 이런 까닭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나의 별명은 ‘약 백’(소개팅을 약 백번정도 했다는 뜻 임)으로 통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큰 결심을 했다. 나와 같이 솔로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나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경험했던(여기서 경험은 당연히 실패의 경험이다) 일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고자 한다.

첫 글이니 만큼 내가 지금껏 만남에서 가장 충격적인 만남의 일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글에서 나오는 이름은 전부 가명 처리함을 밝힌다.

일명 평택 테러 사건.

때는 바야흐로 2001년 2월로 기억이 된다. 내 나이 29세. 피부는 탱글탱글(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탱글탱글하지는 않다.....ㅠㅠ) 계절은 2월 초로 기억된다. 모든 소개팅이 그렇지만 주변의 친한 사람들이나 친인척을 통해 이뤄지게 마련이다. 당시 만남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있는 외삼촌의 소개였다. 평소 전화가 없던 외삼촌께서 직접 나에게 전화를 주셨다.

“수한아! 이번 주 일요일 뭐하니”

“(한참 생각할 것도 없이)별 일 없는데요”

“그럼 전화번호 하나 적어봐라. 내가 데리고 있는 선생인데 전화해서 대전하고 평택중간이 천안이나 어디서 한번 만나 봐라”

“예. 외삼촌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웠다. 외롭게 홀로지내는 조카를 위해 이 시대 최고의 신부감으로 꼽히는 여선생을 소개해 주시다니, 드디어 나도 외삼촌 덕을 보는구나. 하여간 이차저차, 저차이차로 일요일 내가 평택으로 가서 여선생을 만났다. 만남은 즐거웠다. 조그마한 평택에서 점심으로 스테이크를 먹고, 호구조사하고(가족관계, 취미, 종교...뭐 이런 기타 등등)평소 소개팅과 별반 다르지 않게 우리의 만남은 이뤄졌다. 그리고 가까운 극장에 가서 내 기억으로는 이병헌, 이은주 주연의 ‘번지점프를 하다’를 재미있게 보고, 간단하게 우동집에 가서 저녁을 먹은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리고 헤어진 시간이 저녁 8시쯤 오전 11시에 만났으니 9시간 동안 함께 했던 것 같다. 백번에 가까운 소개팅을 했지만 가장 길게 했던 소개팅이었던 것 같다. 평택에서 대전으로 내려오는 내내 콧노래가 났다. 그 여선생과의 만남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잘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전에 도착해서 외삼촌께 전화를 드렸다.

“외삼촌, 잘 만났어요. 다음에 또 보기로 했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너무너무 고마웠다. 나에게도 꽃은 피는구나.

대전과 평택 거리가 있기 때문에 주중에는 만나지 못하고 전화통화와 메일 교환을 계속했다. 전화통화를 하는 동안 그쪽에서도 상당히 잘 받아줬고 메일 답장도 가끔 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모든 게 잘돼가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잘돼가고 있었다.

그리고 금요일 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것도 술에 취해서

보통 술 먹고 이성에게 전화하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감격이었다.

“내일 뭐 하세요”

“저, 내일 근문데요”

“내일 좀 올라오세요”

“내일 격주근무라 퇴근이 늦는데 다음 주에 올라가면 안 되나요”

“아니요. 내일 꼬~~옥 올라오세요”

“예, 그럼 제가 5시 퇴근이니까 도착하면 6시 조금 넘겠네요. 도착해서 전화 드릴께요”

전화를 끊고 생각해 봤다. ‘왜 내일 꼭 오라고 할까? 무슨 일 일까’라며 달력을 바라봤다.

그거였다. 다음주 목요일이 발렌타인데이. ‘그래 나 초콜릿 주려고 부르는 구나. 다음 주 주말에 올라가면 늦게 주는 게 되니까 먼저 주려고 부르는 구나. 나도 이제 발렌타이데이에 여자한테 초콜릿을 받아보는 구나’

정말 금요일 밤과 토요일 일이 손에 안 잡혔다. 빨리 일 끝나고 평택에 올라가서 초콜릿 받을 생각을 하니....흐흐흐....웃음이 절로 났다.

오후 5시. 윗사람들 눈치 보는 것도 포기하면서 나는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고속도로 소통이 원활하지는 못했다. 아니. 급한 마음에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6시 30분쯤 안성 톨게이트가 보였다.

“저 지금 톨게이트 다 도착했거든요. 준비하세요. 집 앞에서 전화드릴께요.”

그러나 이를 어째. 전화에 정신이 팔려서 톨게이트 진입로를 놓쳐 버린 것이다. 한참을 더 가고 나서야 오산 톨게이트로 나올 수가 있었다. 오산에서 평택까지 고속도로를 탈 엄두가 안 났다. 올라오면서 언뜻언뜻 보인 고속도로는 정말 주차장을 방불케 했기에 난 국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내가 언제 경기도 국도를 타 봤어야지 쉽게 가지 도대체 어디가 어디인 줄 모르겠고 해는 떨어져서 어둡고 갈 길은 멀고 막막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때 이렇게 헤매고 돌아다닌 것이 몇 시간 후 나에게 일어날 충격적 사건의 전초전이라는 것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8시 30분이 돼서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전후 사정을 얘기했더니 그녀 또한 고생이 많았겠다며 위로와 함께 평택에서 제일 유명한 돈가스 집으로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분위기는 좋았다. 그때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대충 간추려 보면 그녀는 GOD를 좋아한다고 했고 그래서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했다. 대전에는 93년 EXPO관람차 고교시절 수학여행 와 본 게 다였다고 말한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자리를 옮겨 커피숍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처음에는 얘기가 잘 진행이 됐다. 언제한번 대전에 내려오면 내가 구경 제대로 시켜주겠다는 등 뭐 어찌어찌 얘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죄송한데요. 소개해 주신 분한테 우수한씨가 저 별로라고 얘기 좀 해주세요.”(사실 이때 까지만 해도 소개해준 교장선생님이 나의 외삼촌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저 옛날 같은 동네 살던 아저씨쯤으로 설명을 한 상태였다)

이게 뭔 소린가? 갑자기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나는 어처구니없는 그녀의 부탁에 마음을 진정 시키고...

“왜요?”

“아직 누굴 사귈 수 있는 여유가 없어요. 지난 일주일 동안 우수한씨와 전화 통화하고 메일 주고받으면서 아이들한테 집중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이런 부탁드리는 거예요”

지랄... 뭐여 먼데 있는 사람 불러 앉혀 놓고 한다는 소리가 겨우 이 소리 하려고 날 불렀다 말인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때 이어지는 더 충격적인 말

“전화로 말씀 드리려다가요 이런 얘기는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 오늘 오시라고 했어요”정말 사람 환장하겠네. 그런 얘기는 부담 안 가게 전화로 하던지, 정 도리가 아닐 것 같은 지가 내려와서 얘기하지 사람을 오라 마라 해 놓고 기껏 한다는 소리하곤. 이 여자 정말 선생 맞아?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아이들을 가르쳐도 된단 말야? 우씨....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눈꼽만치도 없네.

그때부터 맥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니 맥이 풀렸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초콜릿을 기대하고 갔던 놈한테 이별 통보라니 정신을 차릴 수 가 있겠는가? 그것도 평택까지 불러서....수습이 되지 않았다.

부랴부랴 그녀와 자리를 끝냈다. 평택에서 대전으로 내려오는 고속도로. 어찌나 서럽던지 나도 모르게 눈에서 무언가가 흘러 내렸다. 눈으로 훔쳐내도 계속 흘러 내렸다. 천안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아니 어찌 보면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천안을 지나면서 이성을 찾기 시작했다. ‘오히려 잘됐어. 그런 사람 오래 사귀었으면 더 힘들었을 거야’라고 위안하면서 내려왔다.

그날 그렇게 그녀한테 차이고 와서 나는 일주일간 밥을 먹지 못했다. 밥을 먹으면 속에서 받질 않아 계속 구역질을 했다. 일주일 만에 2kg이나 빠졌다. 충격이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난 항상 이런 식이다. 혼자 좋아하다가 차이면 혼자 가슴아파하는....

하지만 오늘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라는 희망으로 또 다른 만남을 기대해 본다.

오늘의 소개팅 원칙 하나.

절대로 멀리 있는 사람은 만나지 마라. 그 사람과 잘못될 경우 집으로 오는 길이 너무 힘들다. 그리고 혹 잘됐다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차비나 기름 값 기타 비용이 홈그라운드의 2배 이상이 소요된다. 만약에 타 지방 사람과 꼭 소개팅을 하려면 여자를 배려한답시고 여자를 만나러 가지마라. 중간지점을 정해 만나야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손해가 덜하다. 아주 정이 들기 전까지는 여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오히려 부담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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