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감시 공화국'…안보 내세워 사생활 ‘손바닥 보듯’

  • 입력 2004년 2월 1일 1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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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가정보원이 납득하기 힘든 ‘국가안보’를 이유로 외교통상부 출입기자의 휴대전화 통화기록까지 조회한 것으로 드러나 수사기관의 통신기록 조회가 남발되고 있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휴대전화 인터넷 등 세계 최고 수준의 통신 인프라가 역으로 국민 감시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정보통신부가 지난해 상반기(1∼6월) 수사기관의 개인 통신기록 조회 건수를 집계한 결과 7만7118건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통신의 발달로 유무선, 데이터 통신 등 모든 통신기록이 컴퓨터 데이터로 남기 때문에 개인이 국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며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한 통신기록 조회에 대한 견제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사생활은 없다’=기업 내 고급정보를 다루는 배모씨(35)는 요즘 휴대전화 사용을 꺼리고 있다. 가까운 친구가 수사기관에 있다는 선배로부터 전해들은 자신에 대한 정보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통화한 날짜와 시간, 통화한 사람과 만나서 한 얘기들을 선배가 소상히 알고 있었던 것. 그는 “이번 국정원의 국민일보 기자 통화기록 조회와 같은 국가기관의 통신기록 조회가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반응이다.

지난해 수사기관의 통신기록 조회에 협조한 업체는 KT 하나로통신 SK텔레콤 등 15개 기간통신업체 외에 네오위즈 야후코리아 코리아닷컴 등 부가통신사업자와 별정통신 사업자 등 모두 70여개 업체로 파악됐다. 거의 모든 통신 관련 업체가 수사기관에 가입자 정보를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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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최근에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수신칩을 내장한 단말기가 나와 휴대전화 가입자의 위치를 5m 이내 단위까지 쫓는 일도 가능해졌다. 특히 위치추적의 경우 보안관리가 허술해 국가권력기관이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고 있다.

최근 SK텔레콤 직원이 낀 일당이 외부 의뢰인에게 돈을 받고 가입자의 위치를 알려준 것이 적발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 이들은 가입자 몰래 ‘휴대전화 위치추적’ 서비스에 가입해 가입자의 위치를 타인에게 노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가입자 단말기의 고유번호(ESN)를 입수해 만든 복제단말기가 활용된 점도 경악스러운 대목.

정통부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복제전화에 의한 도·감청 의혹이 제기되자 “원본 전화기가 없으면 단말기 복제는 불가능하다”고 자신했지만 통신업체 직원이 마음만 먹으면 단말기 원본 없이도 얼마든지 복제전화 제작이 가능한 것으로 증명된 것이다. 지난해 방송사 실험을 통해 복제전화에 의한 휴대전화 도청이 가능한 것으로 입증됐지만 이 같은 도청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관련법 개정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통신비밀 침해는 합법?=현행 통신비밀보호법 제13조는 ‘검사 및 사법경찰관이 통신사실확인자료를 요청하는 경우 관할지방검찰청 검사장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돼 있다. 또 ‘정보수사기관의 장은 국가안전보장과 관련한 위해를 방지하기 위해 통신기록 조회를 요청할 수 있다’고 예외조항을 두고 있다. 그러나 ‘국가 안위와 관련된 사안’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 기관장 도장만 받으면 손쉽게 통신기록을 볼 수 있게 돼 있다. 기자 통화기록 조회 사건의 경우도 안보와 관련된 부분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보기술(IT)의 발달로 개인정보는 도처에 기록이 남고 있지만 허술한 조회절차로 인해 국민은 ‘상시 감청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시민단체와 학계 등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 때문에 자금력이 있는 기업들은 상당액을 통신 보안에 투자하고 있는 실정. 도청 방지 업체 한국통신보안 안교승 사장은 “기업들이 통신망 보안을 강화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경쟁사나 산업스파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국가기관에 의한 도·감청 및 기록 조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전했다.


김태한기자 freewill@donga.com

나성엽기자 cpu@donga.com

허진석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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