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법종 우석대 박물관장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아닌 태왕릉”

  • 입력 2004년 1월 13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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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 비문(쌍구가묵본)에서 한일 학자들간 논란이 되는 부분.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에 대해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했다’로,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로 해석했다. -사진제공 푸른역사
광개토대왕릉 비문(쌍구가묵본)에서 한일 학자들간 논란이 되는 부분.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에 대해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했다’로,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로 해석했다. -사진제공 푸른역사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태왕릉 주변에서 광개토대왕의 무덤임을 추정케 하는 중요한 유물이 발견됐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학계에서 논란이 돼 온 광개토대왕릉의 실체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논의가 활발해질 전망이다.

조법종 우석대 박물관장(43·사학과 교수)은 13일 오후 고려대에서 진행된 고구려사 논쟁 관련 특별강연에서 “지난해 12월 24일 중국 지안박물관을 방문해 태왕릉 주변에서 발굴된 청동방울에 ‘신묘년 호태왕 (무)조(령) 구십육(辛卯年 好太王 巫造鈴 九十六·괄호 안은 판독 불가능한 글자를 지안박물관 관계자가 추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조 관장은 “호태왕은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정식 시호인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國岡上 廣開土境 平安 好太王)’의 끝부분 세 글자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광개토대왕을 이르는 명칭”이라며 “태왕릉의 묘실 외곽에서 이 같은 청동방울이 발견된 것은 태왕릉의 주인이 호태왕이며 이는 바로 광개토대왕의 무덤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방울에 새겨진 글자 중 ‘신묘년’이라는 한자는 일본 사학계가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광개토대왕릉 비문(쌍구가묵본)에서 한일 학자들간 논란이 되는 부분.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에 대해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했다’로,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로 해석했다. -사진제공 푸른역사

조 관장에 따르면 이 청동방울은 높이가 4.5∼5cm, 위 지름이 2.5cm, 아래 지름이 3cm인 종 모양의 원통형으로 지난해 5월 중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하기 위해 태왕릉 주변을 정비하던 중 금동제 장식품 30여점과 함께 발굴한 것이다.

▽광개토대왕릉은 태왕릉인가=지금까지 국내외 사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 무덤이 태왕릉이나 장군총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정해 왔다. 광개토대왕비 주변에 있는 대형 고분이 이 두 무덤이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방울에 나오는 신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이며 광개토대왕 무덤은 장군총이 아니라 태왕릉”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신중한 판단이 요구된다”며 유보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우선 △호태왕은 광개토대왕만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존칭일 가능성이 있고 △신묘년인 391년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이자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사망한 해여서 아들이 아버지의 넋을 기리기 위해 방울을 만들어 아버지 무덤에 묻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방울에 나오는 신묘년이 육십갑자로 따져 331년이나 451년이 아니라 391년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도 불충분하다는 것.

▽임나일본부설은 뒤집힐까=조 관장은 이번 발굴을 계기로 일본의 일부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해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는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 이위신민(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 而爲臣民)’으로 일본 학자들은 이를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한국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하였다’ 또는 ‘(고구려가) 왜를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 등 비문에 명기되지 않은 고구려를 주어로 삼아 해석해 왔다.

조 관장은 “방울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기념할 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호태왕이 즉위해 왜를 격파한 기념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고구려사)는 “현재로서는 어떤 사실도 단정 지어 이야기하기 힘들지만 이번에 발굴된 유물이 고구려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며 “청동방울 외에 함께 발굴된 유물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개토대왕 무덤에 대한 학계 논란
태왕릉이라고 확신하는 근거태왕릉이라고 단정 짓기 힘든 이유
-신묘년은 391년 광개토대왕 즉위 연도이다.
-호태왕은 광개토대왕 관련 사료에만 나오므로
광개토대왕을 뜻한다.
-‘신묘년 호태왕…’이라는 글귀가 적힌 청동방울이
태왕릉 주변에서 발굴됐으므로 태왕릉의 주인은 호태왕,
즉 광개토대왕이다.
-청동방울은 양식의 변화가 적어 신묘년이 391년인지
아니면 331년이나 451년인지 확실하지 않다.
-호태왕은 광개토대왕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왕에게도
쓰인 존칭어일 가능성이 있다.
-391년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이자 고국양왕이
사망한 해이다. 즉 청동방울은 광개토대왕이
고국양왕을 위해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태왕릉은 고국양왕의 무덤일 수 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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