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교수 '혈세 낭비 부끄러운 고백' 전문

  • 입력 2003년 8월 26일 12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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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적으로 일한답시고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 탓으로 국민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6월말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느 방송국에서 출연 제의가 왔으나 여행을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자기들과 유럽에서 촬영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언제, 무엇을 확실히 촬영하는지 연락이 없다시피 했다. 나는 PD와 상의한대로 사전 답사와 조사를 열심히 했으나, PD가 오기 직전 촬영 내용이 바뀌어 허사가 되었다.

나름으로 공적으로 일했으나 별안간 사적인 허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내 돈과 시간을 사용하여 한 것이니 무방하다. 내가 바보같이 촬영을 허락한 탓이니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PD가 온다는 날 아침 공항에서 그동안 함께 여행한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홀로 밤까지 PD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밤늦게 연락하니 내일 밤에 온다는 것이었다. 이틀을 그 공허한 공항에서 공적으로 사람을 기다리는 사적인 희생은 너무나 괴로웠다. 늦게 온 이유는 그동안의 잦은 출장으로 공짜 비행기표가 생겨 가족을 데려오려는데 시간이 맞지 않았다는 것 등이었다.

마침 당시 독일에서는 공적으로 생긴 공짜 비행기표를 사적으로 사용했다가 파면당한 국회의원 사건으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진짜 악몽은 PD와 함께 보낸 1주일이었다. 그의 두 살 난 아기가 고열로 아파 호텔로 안내하여 재웠으나 열은 내려가지 않았다.

그래서 2일째 늦게 합류한 촬영기사가 끄는 작은 자동차로 함께 병원과 약국을 찾아 하루를 헤매어야 했다. 3일째 첫 촬영을 하려했으나 미리 연락을 하지 않은 탓으로 불가능했다.

다시 병원과 약국 그리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아기를 위해 밤늦게 외식과 한식집을 찾아 헤매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촬영과 무관한 관광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혈세 낭비에 동참한다는 죄의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1주일을 통째로 오직 작은 자동차 안에서 고열로 울부짖는 아기와 화장실 가는 여유 외에 개인 시간을 단 1초도 갖지 못하고 1주일을 허무하게 지내는 그런 고통은 내 평생 처음이었다.

내 자신 그렇게 무력하고 무능하며 무가치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더 큰 고통은 공적인 것이었다. 내가 출연한 프로그램은 거의 찍지도 못하고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것에 따른 고통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계획된 일을 하지못한채 보내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공적으로 할 일은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혈세를 낭비한다는 점이 너무나 괴로웠다.

공무원이나 회사원은 모두 이런 식으로 공을 빙자한 사적인 낭비를 일삼는가? 게다가 사인인 나는 왜 덩달아 공인이 되어 그 짓을 해야하는가?

더욱 괴로운 것은 사적인 대화나 행태였다. 예컨대 PD는 시골 사람인 나에게 자신은 절대 시골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식당에 가서는 별안간 먹기 싫다고 하며 다른 고급 식당에 혼자 가서 먹었다. 항상 밤늦게 먹는 저녁은 분위기 좋은 곳을 찾는다고 더욱 늦어졌다. 겨우 촬영을 하려다가도 별안간 부인이 쇼핑을 해야 한다며 몇 시간 걸려 호텔에 가서 부인과 아픈 아기를 데려왔다. 나는 값싼 호텔에 자자고 했으나 냉장고가 없다고 비싼 호텔로 옮겼다.

촬영을 하게 해달라고 한 시간 이상 사정을 했다가 사전 허가가 없었으니 약간의 돈을 내야 한다는 말에 PD는 그냥 촬영을 포기했다.

마지막날 겨우 비행기를 탔을 때 나는 해방감을 느꼈으나 비행기 값 때문에 다시 괴로웠다. 본래 내가 산 비행기표를 바꾸어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PD와의 연락이 늦어지는 바람에 표를 바꿀 수 없어 혈세로 다시 산 표였기 때문이었다.

표를 바꿀 수 없게 되자 나는 이 촬영을 그만 두자고 말했으나 자신들이 사주겠다고 했다. 바로 그 때 그만두어야 했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엄청난 혈세를 낭비했다. 피땀 흘려 그 혈세를 낸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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