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학자 한태연씨 "유신 개헌안은 법무부 작품"

  • 입력 2001년 12월 9일 18시 18분


유신헌법 제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원로 헌법학자 한태연(韓泰淵·84·사진) 전 서울대 법대 교수가 유신헌법 제정경위 등에 대해 공개 석상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한 전 교수는 8일 한국헌법학회(회장 안경환·安京煥) 주최로 서울대 근대법학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역사와 헌법’ 학술대회에서 유신헌법 제정 경위 등을 공개했다.

한 전 교수는 1972년 신직수 당시 법무장관과 서일교 총무처장관, 갈봉근 전 중앙대 법대교수 등과 함께 유신헌법 제정 실무를 맡은 ‘법무부 헌법심의위원회’에 참여했던 인물.

그는 “72년 비상계엄이 선포된 직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청와대로 나를 불러 직접 만든 ‘헌법 개정안’이라며 초안이 적힌 조그만 메모지를 내밀었고, 내용을 설명하며 ‘법무부를 도와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회고했다.

그는 “법무부에 가보니 당시 김기춘(金淇春·현 한나라당 의원) 검사가 주도해 초안을 이미 완성해놓은 상태였고 법무부가 ‘골격에는 절대 손대지 말라’고 해 자구 수정만 해줬다”고 주장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 서울대 법대 정종섭 교수 등 후배 학자들은 그에게 “유신헌법과 5·16 쿠데타의 정당화 및 선전 등에 앞장서는 것이 학자의 도리였느냐”고 추궁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처음에는 “인민재판 같다”며 애써 웃으며 피해가려 했지만 결국 “당시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북한의 남침위협 등을 고려할 때 유신헌법은 강력한 국민 통합과 조국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불가피했다”는 논리를 폈다.

그는 “개인의 역사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5·16군사혁명이 있었기에 오늘의 발전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는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발언은 새로 임원진이 개편된 헌법학회가 ‘헌법학계의 과거 청산’ 차원에서 헌법 역사에서 가장 큰 논란이 돼온 유신헌법 제정의 실상을 밝히고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한 전 교수를 초청해 특강 기회를 줌으로써 이뤄졌다.

헌법학회 창설자이기도 한 한 전 교수는 유신헌법 제정에 앞장서면서 박 전 대통령의 독재를 정당화하고 장기 집권의 법적인 근거를 제공해 줘 ‘권력의 미용사’ 역할을 해왔다는 비판을 받아왔으나 그동안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안경환 회장은 “유신헌법 제정 당시 기록이나 관련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한 전 교수가 공개한 내용은 역사적 가치가 있지만 자기반성 등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한편 김 의원은 한 전 교수의 주장에 대해 “당시 법무부 검사치고 유신헌법 제정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며 “나는 평검사로 일하면서 상부에서 시키는 잔심부름 외에는 한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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