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1년 2월 16일 18시 44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지금까지 의사의 진단서만 있으면 대체로 피해 사실을 인정해 오던 법원이 ‘만약 의사가 의학적 근거 없이 피해자의 말만 믿고 상해진단서를 발급했다면 사고의 크기와 치료 후 신체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것. 이와 함께 ‘꾀병’을 부린 피해자와 그 과정에 개입된 의사 모두 사기범으로 처벌할 수 있는 길도 열어놓았다.
이는 단순 접촉사고라도 가해자가 음주나 무면허, 뺑소니 등의 약점이 있을 경우 피해자가 다친 것으로 위장, 합의금을 갈취해 온 행태를 법원이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전주지법 정읍지원 노수환(盧壽煥)판사는 15일 김모씨(25)가 운전하는 택시와 가벼운 접촉사고를 낸 뒤 뺑소니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모씨(45·여)에 대해 “의사의 상해진단서가 몸이 아프다는 김씨의 말만 믿고 발급된 데다 사고 크기 등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김씨가 상해를 입었다고 볼 수 없다”며 ‘뺑소니’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뺑소니’란 ‘상해(傷害)’와 ‘도주(逃走)’의 두 가지 요건이 모두 필요한 범죄로 피해자의 ‘인적 피해’가 필수적이다.
노판사는 그 대신 “택시운전사 김씨가 허위로 전치 3주의 상해진단서와 입원치료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며 “김씨와 진단서를 발급한 의사 황모씨에 대해 사기 및 공갈 등 혐의로 수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법원이 뺑소니 사고에 대해 “상해진단서가 있지만 구호의무를 필요로 할 만큼 큰 상처가 아니다”며 무죄를 내린 적은 간간이 있었지만 상해진단서의 신빙성에 대해 직접 의문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
노판사는 판결문에서 “방사선 및 컴퓨터 단층촬영 결과 김씨가 상해를 입었다고 볼 만한 소견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차량의 파손상태가 페인트칠만 약간 벗겨질 정도였으며 뒤늦게 아프다고 주장한 점 등으로 볼 때 상해를 입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노판사는 김씨가 제출한 진단서와 방사선 촬영사진 등을 초진의사 황씨가 아닌 다른 의사에게 조회, “상해를 입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소견서를 받아 이 같은 판결에 이르렀다.
노판사는 그러나 전씨가 면허정지기간 중 술을 마시고 운전한 부분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노판사는 이와 관련, “교통사고를 낸 사람이 형사처벌 대상자일 경우 피해자들이 허위로 상해를 가장해 합의금을 뜯어내거나 보험금을 청구하는 행태가 사회에 만연해 있다”며 “피해자가 억울하게 손해를 보는 일도 없어야 하지만 가해자가 억울하게 처벌당하거나 피해를 입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대한손해보험협회 반기호(潘基鎬)보험범죄대책팀장은 “그동안 상해가 없는 사소한 사고에서도 진단서를 발부받아 보험금을 타내는 바람에 보험료가 오르는 등 성실한 계약자들이 불이익을 받아왔다”며 “이번 판결로 피해자의 말만 듣고 무책임하게 진단서를 발급해주는 관행도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 김세곤(金世坤)공보이사는 “상처부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단이 달라질 수 있다”며 “초진한 의사의 소견이 가장 중요하다”고만 말했다.
<하종대·민동용기자>orion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