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동아]식물인간된 아내 14년간 간호한 망부가

  • 입력 2001년 1월 29일 15시 55분


《14년전 둘째 아들의 생일날 갑자기 쓰러진 아내. 금세 일어설줄 알았던 아내는 병명도 모른 채 식물인간이 되어 살아야 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지만 그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결국 지난해 12월19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날 "더 잘해주지 못한 게 한스럽다"며 끝내 눈물을 쏟고만 고려대 안암병원 치과과장 권종진 교수의 아내를 향한 망부가.》

고대안암병원 치과 권종진 과장(52)은 요즘 5층 병실을 회진하고 나서 무심코 3층 중환자실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멈추곤 한다. 중환자실은 지난해까지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아침 저녁 회진할 때나 틈날 때마다 찾던 곳이다. 그곳은 30대 초반에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14년 동안 눈과 입으로만 얘기해야 했던 ‘식물인간’ 아내 한전씨가 누워있던 곳.

아내는 지난해 말 마지막으로, 물기어린 두 눈을 깜빡이고, 46년의 삶을 마감했다. 권교수는 “아직 아내가 떠났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면서 “무심결에 중환자실 앞까지 갔다가 ‘아차’하며 아내 없는 빈 자리를 느낀다”고 말했다.

중환자실에서 자신의 연구실로 가는 ‘먼 길’, 고개를 숙이고 타박타박 발걸음을 옮기는 권교수의 눈앞엔 목소리를 잃은 아내가 눈을 찡그리고 힘들게 입술을 움직여 얘기했던 숱한 순간들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간다.

지난해 말 <주간동아>와 동아닷컴에 14년 동안 아내를 극진히 간호한 권교수의 가슴저린 사연이 소개됐다. 그 뒤 동아닷컴의 홈페이지와 동아일보사엔 호주 태국 등에서 수백통의 이메일과 편지가 쏟아졌다.

그러나 정작 권교수는 지금 아내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는 한가해지면 94년 아내의 병세가 잠시 좋아져서 손목 아래 힘이 있을 때 볼펜으로 힘들게 눌러쓴 편지들을 읽는다. 더러 눈가가 젖기도 하고 입가에 웃음이 스며들기도 한다.

“머리손질 하러 명동에 갔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당신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한전, 한전’ 하며 저를 부르던 모습이 떠올라요. 너무 반가웠고 기뻤어요.”

“한시 바삐 어디론지 당신 곁에서 사라지고 싶어요…. 당신의 서글픔, 고통, 아픔, 괴로움, 피곤함과 고달픔, 경제적 어려움과 마음고생….”

“내가 조금 괜찮아졌을 때 당신에게 병원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애원했죠. 당신은 말없이 나를 휠체어에 싣고 비오는 현관 앞으로 옮기고 음료수 하나를 내 손에 쥐어줬죠. 그리고 내 곁에 앉아 침묵한 채 줄담배를 피웠지요. 빗줄기는 한없이 내리퍼붓고….”

아내는 87년 둘째 아들의 두 돌 생일 때 쓰러졌다. 금세 좋아질 줄 알았던 아내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고 얼굴 표정만 살아 있는 상태로 14년이 지났다. 아내는 목에 꽂은 튜브를 통해 산소와 영양을 공급받았고 이 튜브를 떼면 곧 숨을 거두게 되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신경과 의사들은 목 앞쪽의 실핏줄이 막혔기 때문이라고 추정했지만 정확한 병명도 모르는 상태에서 답답한 세월은 흐르고 또 흘렀다.

권교수는 지금도 아내가 쓰러진 순간이 생생하기만 하다. 집에 일찍 들어와 “너무 피곤해 집에서 쉬고 싶다”는 아내의 등을 떠밀어 외식하러 가자며 승용차에 태웠다. 1백일 전 장만한 여의도의 아파트에서 경기도 고양시 벽제의 갈비집을 향해 승용차를 몰았다. 구파발을 지나 삼송리 검문소에 이르자 아내는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대자삼거리를 우회전해 식당에 도착하기 직전 아내는 차를 세워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픽’ 쓰러졌다.

권교수는 급히 비상등을 켜고 정신없이 차를 몰아 인근 병원으로 옮겼으나 아내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생일 저녁을 굶어야만 했던 둘째, 이제 세상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한 여섯살배기 첫째가 아빠의 다리를 잡고 울며서 “배가 고프다”고 매달렸지만 그 긴 밤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나중에야 권교수는 집에서 아내의 짐을 정리하면서 아내가 먹던 혈액순환 개선제를 발견했다. 이미 아내는 증세를 느끼고 있었지만 권교수는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눈물을 글썽이며 후회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식물 인간 아내를 스케일링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그리고 14년이 흘렀다. 아내는 고려대 혜화병원에서 서울대병원을 거쳐 고려대 안암병원 중환자실에 누워만 있었다. 중간에 한두 번 누워 편지를 쓸 정도로 상태가 좋아지기도 했지만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그동안 다리뼈가 몇 번 부러지고 욕창에다 각종 합병증이 뒤이었다. 세상을 등지기 몇 해 전부터는 허파를 비롯, 온몸의 장기 기능이 급격히 떨어졌다.

고대 안암병원 3층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아내 한씨는 1층에서 올라오는 남편의 발소리를 다른 사람의 발소리와 구별했다. 1층 계단을 올라가다 일이 생겨 다른 곳에 갔다 한두 시간 늦게 오면 화를 내기도 했다. 아내로선 틈날 때마다 찾아오는 권교수가 세상의 창이었다.

아내는 입술 움직임과 눈으로 “팩스가 무엇이냐” “컴퓨터로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등을 물었고 권교수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언젠가는 아내가 일어날 것을 굳게 믿으며….

아내가 중환자실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했지만 권교수는 보통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싸움도 했고 자녀문제 때문에 다투기도 했다고 한다. 부부가 다툴 때엔 권교수의 목소리만 들려 사정을 모르는 중환자실 의사나 간호사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몇년전 염색하고 중환자실에 나타나자 아내는 여자 생긴 거 아니냐고 따지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고. 그 뒤로는 한번도 머리 염색을 하지 않았다.

한번은 아내에게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얘기를 했다가 다툰 적도 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식물인간’이라는 사실이 싫어 학교에 써내는 인적사항란에 ‘엄마가 외국 유학중’이라고 썼다. 그가 아이들 얘기를 하며 탄식하자 아내는 “우리 착한 아이들이 그럴 리 없다”고 화를 냈다. 큰아들은 지난해 12월23일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입대했고, 둘째는 올봄 대입 수험생이 된다. 그러나 한씨는 여섯 살, 세 살 때의 아이들로만 여기며 세상을 떠났다.

권교수는 14년 동안 아내를 돌본 것이나 아이들이 잘 자란 것은 오로지 자형 신승호씨(60·교사)와 큰 누님(59) 덕분이라고 말한다. 아내가 쓰러지자마자 병원비 마련과 아이들 양육을 위해 광진구 중곡동에 있는 큰누나 댁으로 들어왔다. 자형은 연립주택 2개 층 중 하나를 임대료 한푼 받지 않고 양보했지만 지금껏 한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는 두 아이에게 ‘엄마’ 노릇도 해야 했다. 98년 누님마저 병으로 쓰러졌던 것. 그때는 장남이 고3 때였다. 아내와 누나를 함께 돌보면서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들의 도시락 2개를 싸야 했다. 이때엔 하루 3시간 이상을 자지 않으며 가족과 환자를 함께 돌봤다.

권교수는 아내에게 좀더 잘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그러나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몇 가지는 두고두고 고마워했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94년 아내 한씨는 극도의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결심하고 혀를 깨물었다. 병원에선 “외상은 없는데 피가 모자랄 때 생기는 증세와 마찬가지로 헤모글로빈 수치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며 급히 그를 불렀다. 확인해 보니 혀가 거의 다 잘려 있었다.

권교수는 직접 혀를 꿰매는 수술을 했다. 아내의 깡마른 손을 꼭 잡고 “병명이 밝혀지고 치료법이 나올 때까지 꿋꿋이 살아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았다. 이때 한씨는 남편이 자신의 눈과 입술을 정확히 읽고 정신과 의사에게 전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몇 달 뒤에는 아내에게 중환자실 바깥을 구경시켜줬다. 주치의에게 스케일링을 해줘야 한다고 우겨 1층 자신의 진료실로 데리고 온 것. 아내는 남편의 방에 온 것을 너무 행복해했다. 권교수는 빨대를 통해 아내에게 커피를 먹여주었다. 아내의 얼굴은 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아내는 몇 달 뒤 편지를 쓸 수 있게 됐고 “그 때 세 컵이 아니라 열두컵이라도 마시고 싶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의 이런 정성은 3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도 대견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의 어머니는 두 가지 유언을 남겼다.

“술 담배 끊고 며늘아기는, 가엾은 며늘아기는 네가 끝까지….”

권교수는 지금까지 담배를 끊지 못했고 술도 일주일에 한두 차례 폭음하지만 아내 사랑만은 지키려고 애썼다. 두 아들과 함께 눈물을 훔치며 장례식을 준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매번 아내가 위기를 이겨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사실 흔들린 적이 있다.

“나이 40이 될 때, 아내가 쓰러진지 10년째일 때, 아내가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나중에 아이가 다 큰 다음 다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부부 사이엔 사랑 못지않게 책임이 중요하니까요.”

권교수는 시련을 이겨내고 국내 최고의 치과의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월급은 몽땅 아내 진료비로 쏟아붓느라 돈을 모을 수 없어 아직 누나댁에 더부살이하고 있지만 실력은 누구나 인정해 ‘치과의사들이 필요할 때 급히 찾는 의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구강암, 주걱턱 수술을 비롯, 구강외과의 각종 수술과 임플란트 시술분야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동아일보에 게재된 ‘베스트닥터 건강학’에 치과의 꽃으로 불리는 구강외과 부문 최고 명의로 뽑히기도 했다.

시련을 이겨내고 국내 최고 치과의사라는 평가받아

지난해 초에는 일본 도쿄대병원에서 포기한 환자도 살렸다. 환자는 사업 때문에 일본에 갔다가 질주하는 승합차의 사이드미러에 얼굴을 부딪혀 코 아래 전체가 없어진 상태. 일본에서 급히 옮겨 12시간 수술 끝에 살려냈다. 환자의 갈비뼈를 떼어내 얼굴뼈를 만들고 광대뼈 관절을 만드는 고난도의 수술이었다. 이제 환자는 자신의 갈비뼈로 갈비를 뜯을 수 있게 됐다.

90년대 중반엔 독일 스웨덴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 잇따라 초빙받아 한 환자의 수술사례를 발표했다. 환자는 농약을 마셔 입과 목안이 몽땅 녹아버린 30대 중반의 여성. 어깨의 근육과 인대 등을 떼어내 혀와 입의 얼개를 만들어줬지만 입술은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상태였다. 보통 때 입술은 입안 조직을 떼어내 만드는데 입안이 다 타버렸으니…. 권교수는 환자의 온몸을 살피며 마침내 연조직을 찾아냈고 수술에 성공했다. 선진국 의사들도 그가 환자의 질을 떼어내 이식했다고 밝히자 탄성을 지를 따름이었다. 그는 이와 같이 10시간 이상 걸리는 힘든 수술을 매년 2, 3차례 한다.

재작년에는 산둥대학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 CCTV에 출연해 임플란트 특강을 했고 산둥대에선 ‘권교수에게 시술을 받으려는 환자들이 줄을 잇고 있으니 제발 좀 방문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또 미국 유럽 등의 기업에서는 그가 개발한 인공치아를 특허료를 받고 팔라는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

권교수는 박사과정에 있을 때 친척의 소개로 대학을 갓 졸업한 아내를 만났다.

“철없는 아내는 저를 철석같이 믿고 결혼했고 저는 끝까지 아내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머니의 유언 중 하나는 지켰으니까 두 가지 약속은 지킨 셈이죠.”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유해를 가족 납골당에 안치했다. 경기도 용인시에 가족 납골당을 마련했지만 막내인 그가 먼저 아내의 유해를 안치하는 것이 가족에게 예의가 아닐 것 같아 당장은 유해 봉안소에 모신 것.

그는 사실 못 지킨 약속이 있다고 고백했다. 한씨는 병원측에 장기기증을 약속하고 꼭 그렇게 되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했는데 증세가 갑자기 악화돼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또 장례식을 치르지 말고 자신을 화장해 강이나 바다에 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내의 자취가 너무 멀어지는 것 같아 그것 또한 지키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제자나 간호사 환자 중엔 권교수의 아내가 숨지기 전까지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입가엔 늘 미소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직원과 함께 노래방에 가면 신세대 노래를 부르고 후배들에게도 밝은 노래를 권한다. 가난한 환자를 만나면 어떻게 진료비를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한다. 요즘은 장애자를 위한 치과진료 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다.

권교수를 몇 년 동안 지켜봐온 한 간호사는 말한다.

“권교수의 눈과 마음은 참, 하늘과 호수 같답니다. 모두들 그 맑음에 푹 빠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글·이성주<동아일보 이슈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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