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범 정필호 발견서 검거까지]긴박의 90분

  • 입력 2000년 3월 7일 20시 06분


탈주범 정필호씨(37)의 검거 순간은 액션영화보다 더 긴박했다.

정씨가 다시 경찰의 포위망에 걸려든 것은 7일 오전 6시16분. 지난달 25일 이후 열이틀 동안 정씨의 동거녀 전모씨 집 전화를 24시간 내내 감청하고 있던 최광열(崔光烈·45)경사의 눈이 갑자기 번뜩였다. 아침 일찍 걸려온 전씨의 집 전화기에서 정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

“너, 호야지. 자수하자”라는 전씨의 말에 정씨는 “7시에 불광사앞 삼백집(해장국집)에서 보자”는 말만 반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은평경찰서 전직원에게 사복 차림으로 불광사 앞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30여분이 지난 오전 6시49분 전씨의 집으로 정씨의 두 번째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지 추적 결과 불광동 삼익아파트앞 공중전화였다. 첫 전화를 걸었던 3호선 연신내역앞의 공중전화에서 1.5㎞m 떨어진 곳이었다. 일단 형사 2명은 전씨와 함께 약속 장소로 가고 나머지 직원들은 불광사 주변과 삼익아파트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정씨는 전씨가 형사들과 함께 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산으로 도망갔다. 이어 잠시 후 경찰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산을 내려오던 정씨는 의경 3명과 함께 자신의 승용차편으로 삼익아파트 쪽으로 가던 주인(朱忍·28)순경과 마주쳤다. 정씨의 몽타주 사진을 눈여겨봐 온 주순경은 곧바로 정씨를 알아보고 차를 세운 뒤 정씨를 쫓았다.

정씨의 도주도 필사적이었다. 골목길에서 나오던 승용차를 세워 여성 운전자를 흉기로 위협해 내리게 한 정씨는 차를 몰아 주순경 일행을 향해 돌진했다. 이에 주순경은 정씨가 타고 있는 차를 향해 공포탄1발과 실탄 2발을 발사했다.

승용차의 앞 유리창과 조수석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고 금이 가자 다급해진 정씨는 급히 도망가려 했으나 출근 시간이라 차량들이 꽉 밀려 있는 것을 보고 방향을 돌리려고 중앙선을 넘다 마주 오던 택시의 옆면을 들이받았다.

정씨는 차에서 내려 지나가던 오토바이를 세운 뒤 오토바이 뒷좌석에 올라타 도망을 시도했으나 오토바이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얼마 못 가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때 정씨는 칼을 쥐고 있었다. 다급해진 나머지 또 다른 택시 운전사를 흉기로 위협하던 정씨는 뒤쫓아 온 주순경에게 흉기를 휘두르며 마지막 저항을 했다. 주순경은 정씨의 다리부분을 향해 실탄 한 발을 쐈으나 빗나가자 권총 손잡이 부분으로 정씨의 허리와 머리를 서너 차례 내리쳐 정을 제압하고 정씨를 끌어내렸다. 이때가 오전 7시23분. 1시간30분의 탈주극은 막을 내렸다.

<이현두기자>ruchi@donga.com

▼탈주 두달전 흉기제작 산속은신 밀항 모의▼

탈주범 정필호씨(37)는 탈주 2개월전부터 교도소 창틀로 흉기를 만들어 재판정까지 숨겨 들어오는 대담성과 함께 산속에서 장기간 은신할 계획까지 치밀하게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99년 3월 12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뒤 서울과 광주 등지에서 안마시술소를 무대로 강도 행각을 벌이던 정씨가 경찰에 체포된 것은 지난해 11월 23일. 히로뽕을 복용한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된 정씨는 조사 과정에서 공범이 잡히면서 강도혐의가 추가되자 주도면밀한 탈주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검거 직후 정씨는 “나중에 교도소에 들어온 노수관 등 공범들의 협박에 못 이겨 칼을 만들어 주고 함께 도주할 것을 제의받았다”고 진술하고 있어 이미 검거된 공범들과는 범행 주도 여부를 놓고 진술이 엇갈리고 있는 상태.

그러나 경찰은 그가 체포되기 전에도 강도 행각을 주도했으며 흉기를 직접 만드는 대담성으로 미뤄 이번 탈주극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다른 공범들의 진술로 봤을 때 이들은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정씨는 경찰에서 “범행 2개월전부터 교도소 창틀 쇠붙이로 흉기를 만들었으며 법정에 출두하기 2, 3일 전에 미리 교도소 외벽에 칼을 붙여 놓고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성공했다”고 진술했다.

정씨를 비롯한 탈주범들은 또 탈주후 밀항을 모의하는 등 이후 행동까지 구체적으로 잡아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먼저 검거된 노수관 장현범 등 공범들의 진술에 따르면 정씨는 “함께 교도소를 탈출해 외국으로 밀항하자. 신창원처럼 잡히지 않을 자신있다”며 탈주를 제의했다는 것.

그는 공범들과 서울로 올라오면서 “산으로 도주하면 안전하니 탈주 후 일단 서울로 올라가 관악산에서 20여일 정도 은신하고 이후 연세대 주변에서 만나자”고 제안하는 등 구체적인 탈주 후 계획까지 세워 놓은 것으로 경찰은 파악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정은 탈주 후 산으로 도피할 것에 대비해 교도소에서도 20여일간 단식을 하며 인내력을 키운 것으로 알려져 탈주범 신창원의 탈주 행각을 모방, 연구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윤철기자>yc97@donga.com

▼탈주범 정필호 일문일답▼

7일 경찰에 검거된 탈주범 정필호(鄭弼鎬·37)씨는 12일간 야산에서 은신 생활을 한데다 경찰과의 격투 과정에서 부상을 입어 겨우 입을 열 정도로 기진해 있었다. 그러나 정씨는 이미 검거된 노수관(魯洙官·38)씨와 장현범(張鉉範·32)씨가 자신을 탈주 주도자로 지목한 사실에 대해서는 또렷하게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음은 정씨와의 일문일답.

-노씨 등은 당신이 “탈주해 한탕 크게 하자”고 했다고 진술했는데….

“억울하다. 나는 노씨 등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칼을 만들어 줬고 ‘너도 공범이 되기 싫으면 같이 탈주하자’고 해 함께 행동했을 뿐이다.”

-흉기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가.

“내가 감옥에서 벽의 쇠창살을 뜯어 네 자루를 만들어 법원대기실에서 노씨와 장씨에게 각각 두 자루씩 건넸다.”

-흉기를 지닌 사실을 어떻게 교도관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나.

“법원 출두 2, 3일전 휴지에 물에 적셔 흉기를 교도소 외벽에 붙여 놓고 검색대를 통과한 뒤 흉기를 다시 떼어냈다. 법원대기실을 지나칠 적에도 워낙 사람들이 많아 교도관들이 일일이 검색하지 못한 것 같다.”

-탈주 뒤 어디에 숨어 있었나.

“25일 서울 평화시장에서 노씨가 잡힌 뒤 달아나 줄곧 산에 숨어 있었으며 한번도 민가로 내려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산에서 내려오게 됐는가.

“산속 도피 생활이 너무 힘든데다 애인이 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산을 내려왔다.”

<김상훈박윤철기자>corekim@donga.com

▼정필호 그는 누구인가▼

광주지법 법정 탈주사건의 주범 정필호(鄭弼鎬)씨는 절도 특수강도죄 등으로 교도소에서만 14년 넘게 생활했다. 경찰에 따르면 전과 13범.

전남 함평이 고향인 그는 15세 때인 78년 주거침입 및 절도죄로 장기 8월, 단기 6월을 선고받고 첫 수형생활을 했다. 이어 80년에도 같은 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며 87년엔 강도죄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지난해 3월 만기출소했다. 그는 8개월 뒤인 지난해 11월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혐의로 다시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함께 탈주했다 먼저 붙잡힌 노수관(魯洙官·38)씨와는 고향 선후배 사이. 또 장현범(張鉉範·32)씨와는 교도소에서 알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정씨는 이들과 함께 지난해 10월 전국의 안마시술소를 무대로 강도행각을 벌인 사실이 드러나 추가 기소됐다.

이들은 1월29일 첫 공판 때 광주지법에서 다시 만난 뒤 교도소 운동시간을 이용해 탈주계획을 세운 것으로 검찰 조사결과 드러났다.

<광주=정승호기자>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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