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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11월 10일 22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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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대학 외국어문학부 4반
98057571학번
백인정
“아 악!”
갑자기 들러온 소스라치는 비명소리에 온 식구가 놀라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깼다.아버지의 비명소리였던 것이다.가끔씩 이렇게 악몽에 시달리시는 아버지께서는 술에 만취가 되셔서 집에 들어와 울부짖으시는 일도 적지 않으시다.주무시다 비병을 지르거나 울부짖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도 나약해 보였다.
때론 농담으로 가족의 화목한 분위기를 직접 연출하시던 아버지.아버지께선 IMF이후 사업이 잘 안되시자 빚독촉에 시달리시면서 예전의 그런 모습을 감추셨고 자주 술에 취해 들어오시곤 했다.그런 아버지께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어머니께서는 생활비라도 버신다며 낮에는 칼국수 장사를,밤에는 약사보조를 하시면서 몸을 아끼시지 않으셨다.6.25이후의 최대의 국난이라고 불리는 IMF는 우리 가족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난 학교에서 점심때면 아침마다 어머니께서 싸 주신 도시락을 꺼내 먹는다.학교식비가 그리 비싼 편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지출을 줄이려는 방편으로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간혹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날이면 가장 싼 메뉴인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어느날 강의시간에 어느 친구가 “도시락을 싸 다니는 사람은 다른 이와 어울리지도 못하는 사람이다”라는 발언을 했다.몇몇 친구들은 내가 도시락을 싸 다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창피하기도 하고 뜨끔했다.날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냐는 생각에 그 친구를 상대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내 처지가 들키는 것이 두려워 오히려 태연한 척을 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난 가방을 팽개치며 어머니께 대들 듯한 말투로 소리치고 말았다.
“정말 창피해 죽겠어.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니깐 애들이 따돌림 당하는 줄 알잖아.그까짓 식비가 뭐가 아깝다고!”
너무나도 무례했던 나의 행동을 쭉 지켜보신 어머니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화장실에서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저녁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간 나는 어깨가 흔들리고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다.
“인정아,엄마가 아빠대신 생활비를 번다고 나섰지만 너무 감당하기 힘들구나….”
어머니께선 조용히 내쪽을 향해 억지로 울음을 삼키시며 말씀하셨다.그리고 어느덧 쭈글쭈글해지고 말라 심지어는 갈라져 있는 어머니의 손에는 구깃한 오천원짜리와 천원짜리 몇 장이 들려 있었다.다른 어느 부분보다도 가장 빨리 늙어버린 어머니의 손,그 손이 결국은 나로 인해 더 많은 고생을 겪어야 했다는 것을 나는 여태 모르고 있었다.그리고 그러한 손으로 어머니께서 쥐어주신 돈은 칼국수 세 그릇을 팔고 몇시간을 서서 약국 허드렛일을 해야 겨우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엄마,죄송해요….실은 도시락 싸가니깐 애들이 얼마나 부러워 하는지 몰라요.엄마가 신경을 많이 써주니 좋겠다고….”
어머니와 나는 어느새 얼싸안고 울고 있었다.
“돈 없다고 서러워 할 것 없다.엄마가 얼마나 인정이를 사랑하는데….”
어머니의 이런 말씀이 내 가슴을 한없이 행복에 젖어들게 했다.
어머니께서 몸이 악화되어 칼국수를 그만 두시게 되자 이젠 약국에서 받는 30만원 정도로는 다섯 가족의 한달 음식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형펀이 되었다.
지난 학기 등록금은 분할납부신청을 하고 여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어느 정도 충당을 하였지만 나머지 절반의 돈은 구하기가 어려워 부모님께서도 늘 걱정이셨다.내가 지난 겨울처럼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등록금을 마련하는데 어느 정도 보탬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아버지께서 학기중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에대해 반대를 하시는 까닭에 손을 쓸 수도 없었다.
“돈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 마련하도록 할 테니 너는 집안일에는 신경쓰지 말고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거든 열심히 해서 장학금이나 타거라”
아버지께서 늘 습관처럼 이런 말씀을 해주시곤 하셨다.지난 학기에도 기필코 장학금을 타오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나였지만 결국 형편없는 학점을 받고 말았기에 이런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부모님께 너무나도 죄송스럽기만 했다.
어머니께선 저녁으로 약국에 나가시기 때문에 일찍 집에 들어와서 어버지와 동생들의 저녁상을 차려야 했다.그래서 주로 강의시간 이후에 갖는 동아리모임이나 동문회는 전혀 참석할 수가 없었다.집과 학교 사이를 한 번 오가기 위해서는 2시간 30분이라는 무시못할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지난 한학기동안 통학하면서 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나의 현실에 대해서 항상 불만으로 가득 차있었다.집이 가까와서 짧은 시간내에 학교를 오가는 여러 친구들을 수없이 부러워했으며 외박을 하기가 일쑤였다.때문에 누구보다도 보수적이신 아버지와의 충돌이 잦았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내가 처한 이러한 현실에서 오히려 작은 행복을 찾는다.
남보다 이른 시각에 일어나 활동을 할 수 있고 지하철로 여러 지역을 거쳐 학교를 오가는 동안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또한 시험기간이면 지하철 의자에 기대어 가방을 책상삼아 책에 몰두하고,지하철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광경을 통해 인생공부를 즐길 수도 있다.노인을 보고 자리를 양보하는 아저씨와 눈물어린 호소로써 물건을 팔기 위해 나선 부도난 중소기업 사장들을 보게 되고 지하철 안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맺는 사람들이 다정다감한 대화를 나눈 뒤 악수를 하고 헤어지는 광경 역시 목격할 수 있다.
IMF로 모두가 힘든 상황에 돈을 벌어 살아보려는 의지를 보이는 사람들이나 인심을 잃지 않고 정을 주고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결코 나의 상황을 비난할 수 없었다.그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알 수 있었고 삶을 사는 바람직한 태도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며칠전 라디오에서 돈을 버는 동시에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있는 한 10대 기업사장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대한 뚜렷한 목표와 뜻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 일에 몰두한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 거란 말을 남겼다.나는 그 얘기를 듣고 삶의 목표의식과 그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그의 말은 내가 다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 학과 공부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차비를 손에 쥐어주시며 “내가 지금은 돈이 없어 이것밖에 못주는구나”하고 말씀하셨던 아버지.
나약한 몸으로 돈을 버시기 위해 왠종일 고생이 많으신 어머니.
올 겨울은 두분께 자랑스러운 큰딸이 되기 위해 꼭 장학금을 안겨 드리리라.
‘언니,제발 나를 봐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없어? 내가 이렇게 빌께.비록 난 전문대 밖에 못갈 수준이지만 난 언니한테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그러니까 요번만 잘 참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해주길 바래.엄마 아빠도 그만큼 기대를 건 거니까 여태껏 투자를 한 거니깐 제발 엄마 아빠 실망시켜 드리지 말구….예전의 언니 모습 빨리 되찾아서 항상 자랑스런 언니가 돼주라.떨지말고 이제 20일 남았나? 내가 항상 맘속으로 빌께.잊지 마.난 항상 언니 편이 돼줄 수 있다는거….사랑해.
P.S.-언니! 지금은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도 나중에 우리가 철이 들면… 그땐 언니도 엄마가 언니를 얼마나 사랑해서 그랬는지 알 수 있을거야.엄마도 많이 힘드시니까 이젠 눈물 흘리지 않게 하자.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지? 난 이런 말 해줄 자격 없는 거 알지만 언니엑 큰 도움은 못되어도 작은 희망을 주고 살고 싶어.내가 지금 돈 모으는 중이거든? 꼭 합격을 위한 선물 사줄께.그리고 매일매일 기도드릴 거야.우리 언니 자신감 잃지 말고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 있게 해 달라고….’
작년 이맘때 수능을 앞둔 나에게 동생이 준 편지의 내용이다.동생은 항상 자신보다 내가 더 성공하길 바랬고 간혹 내가 방황을 하면 내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울면서 정신차리라고 비는 아이였다.또 동생은 내가 힘들고 지칠 때 가장 먼저 얘길 털어놓는 상대이기도 하다.
내 자신의 행동이 해이해지고 못마땅하다 싶을 때면 난 언제든 이 편지를 꺼내어 보곤 한다.편지를 읽으면 동생의 글이 내게 희망이 되고 작은 행복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이런 동생과 부모님을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다져지는 무언가가 있다.
행복으로 인하여 내가 가진 희망이 작은 결실을 이루도록 반드시 열심히 살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