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회생 힘모으자(하)]근로자-소비자 동참,개혁 열쇠

  • 입력 1998년 5월 13일 19시 29분


일본 산와(三和)은행의 오가사와라 야스유키(小笠原康起)서울지점장은 최근 며칠째 심야 협박전화에 시달리고 있다. “지점장, 이 ×××야. 너 일본×이지. 죽인다. 다시 한번 투쟁. 일본으로 가라”는 등의 내용.

그는 이 통화내용을 공증받아 녹음테이프를 재정경제부에 넘겼다. 산와은행 서울지점은 임금인상을 놓고 노조측의 15%안과 사용자측의 7%안이 팽팽히 맞서 있다.

그는 내달 2일 도쿄에서 일본 경단련 주최로 열리는 대한(對韓)투자설명회의 강사로 내정돼 있다. 그가 본국 기업들을 상대로 ‘한국에 적극 투자하라’고 권유할 마음이 있을까.

재경부 관계자는 “오가사와라지점장은 법적 대응도 준비중인 것으로 안다. 노사정합의를 하고 투자유치설명회를 백번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한다.

민주노총 공공부문 공동투쟁위원회는 12일 “정부가 민영화와 해외매각을 통해 공기업 구조조정을 일방적으로 추진할 경우 6월 2∼4일 사업장별 파업찬반투표를 거쳐 총파업 투쟁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민노총은 2기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선언하고 1기 합의사항인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는 효력을 잃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 관계자들은 “노사정합의를 잘 지켜도 경제위기를 극복할지의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걱정한다.

민노총은 10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에도 불참했다.

이에 앞서 이갑용(李甲用)민노총위원장은 최근 미국 뉴스위크지와의 회견에서 “앞으로 정부와 사용주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을 점차 강화해 5월말이나 6월초 절정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인 투자 분위기가 급속히 얼어붙고 주가폭락 환율상승 등 시장의 불안이 증폭되는 양상이 노동계 등의 5월1일 과격시위에 상당부분 영향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그렇게 말한다.

민노총이 거듭 표명하고 있는 강경자세는 속속 해외에 알려지고 있다. 미국 월 스트리트 저널지는 12일 노동계 불안정이 한국의 빈약한 신인도를 와해시키는 한 원인이라고 보도했다.

노동연구원의 강순희연구위원은 “구조조정기에 노조가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를 슬기롭게 도출해야 하며 그 상당 부분은 노조측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멕시코는 82년 국제통화기금(IMF)관리 아래 들어갔으나 노사정간의 신뢰가 깨지고 노조가 구조조정에 강력히 반발함으로써 6년간 연평균 0.1%의 성장에 그쳤다. 그리고 95년 또다시 외환위기를 맞아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2차 외환위기 상황에서 멕시코 정부는 “당장 20%의 근로자를 해고하지 않을 경우 다음에는 절반을 해고해야 하며 결국은 모두 직장을 잃을 수 있다”며 노조를 설득했다. 노조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멕시코는 3년만에 경제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작년에 법정관리에 들어간 한 대기업의 근로자 복리후생비는 무려 53개 항목에 연간 1천5백억원이 넘는다. 주로 노조의 요구에 따라 책정된 복리후생비 항목에는 어린이날 행사비, 정년퇴직자 여행비, 이발비, 세탁비, 망년회비 등도 포함돼 있다. 이 회사는 수조원의 부채를 끌어안고 있다.

이 회사 사정을 들여다본 정부의 한 관계자는 “노사의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해 있다”며 “이 상태를 그대로 두고 외국인에게 매각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12일 사실상 그룹해체의 운명을 맞은 거평그룹의 계열사인 대한중석은 노사분규 때문에 초경합금 사업부문의 해외 매각이 지연됐다. 이 회사 노조는 매각대금의 20%인 4백60억원을 위로금으로 달라며 지난달 3일부터 17일까지 파업을 했다.

회사측은 노조에 특별상여금 100%를 준다는 조건으로 분규를 타결하고 해외 매각협상을 재개, 곧 매듭지을 전망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초경합금 부문 매각후 청산될 운명이다.

실업자가 공식통계상 1백40만명 수준으로 급증했지만 이른바 3D업종의 중소영세업체들은 여전히 심각한 일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중소기업청은 외국인력을 고용했던 4백여개 중소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지난달 인력수급실태를 조사했다. 이들 업체의 40%가 ‘생산인력이 모자란다’고 답했다.

한편 일부 사회지도층과 부유층의 비정상적 소비행태도 경제회생의 걸림돌로 지적된다.

IMF체제가 낳은 고금리를 즐기는 금융소득계층 가운데는 IMF 무풍지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들의 과소비는 노사정합의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모기업 대표 A씨는 하도급 대금을 허위로 과다계상하는 수법으로 수십억원의 법인세를 탈세, 가족들과 함께 해외골프여행을 즐기다 최근 국세청의 단속에 걸렸다.

19개 외국브랜드업체가 입주해 있는 강남 모 백화점의 수입화장품 코너는 IMF사태 직후 하루 매출이 5천만원으로 줄었으나 2월부터는 1억여원으로 다시 늘었다.

하객수를 3백명으로 잡을 때 식사비만 1천만원에 이르는 특급호텔 예식장의 예약률은 90%를 웃돌고 있다.

프랑스 유력일간지 르 피가로는 최근 “호텔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갖고 프랑스월드컵 입장권이 이미 1만6천장이나 팔리는 등의 사회현상은 한국에 과소비가 건재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지적했다.

〈임규진·박현진·신치영기자〉

[노사정위원회 일지]

△97.12.26〓김대중대통령당선자 노사정협의회 구성요청

△98.1.7〓한국노총 노사정협의회 불참 선언

△1.14〓노사정위원회 구성 전격 합의

△1.20〓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1차 노사정 공동선언 채택

△1.31〓민주노총 항의 불참으로 실질토의 무산

△2.6〓제2차 노사정공동선언문 채택(고용조정 및 근로자 파견 법제화, 공무원 교원 노동기본권 허용, 노조의 정치활동 보장. 노조전임자 임금지급문제 등은 2차 과제로 검토)

△2.7〓10개 의제별 90개항 합의사항 확인. 합의문안의 제목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으로 결정

△4.30〓민주노총, 정리해고 근로자파견제 합의 무효 선언

△5.11〓민주노총, 제2기 노사정위원회 불참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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