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기 추락사고의 정확한 원인은 조사반이 현장에서 수집한 자료를 정밀분석하고 블랙박스 해독, 모의비행실험 등을 거쳐 수개월 내지 1년 뒤에나 밝혀질 전망이다.
그러나 현장조사에서 확인된 사실과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을 토대로 사고발생과정의 윤곽을 어느 정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항공전문가들의 견해다.
지금까지 밝혀진 점은 △조종사가 사고기를 완전통제했다 △기내는 사고직전까지 평온을 유지했다 △관제사는 착륙허가때까지 조종사와 정상교신했다 △활공각유도장치(GS·글라이드 슬로프)와 최저안전고도경보시스템(MSAW)이 정상작동하지 않았다 △기체결함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사고지점 상공에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는 것 등이다. 이를 근거로 전문가들은 3개의 가상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시나리오①:조종사 과실〓전방향표지시설(VD)이 있는 사고지점을 활주로 시작지점으로 착각했다는 가설.
아가냐공항은 지형을 고려해 다른 공항과는 달리 VD를 활주로쪽이 아닌 활주로에서 3.3마일 떨어진 사고지점 야산에 설치했다. 게다가 사고당시 계기착륙 유도장치인 GS가 작동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거리정보를 VD나 LC(항공기에 활주로방향과 거리정보를 알려주는 장비로 활주로 끝부분에 있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사고기가 VD의 거리정보를 LC가 쏴주는 거리정보로 오인했다는 것.
사고기의 랜딩기어가 내려지고 보조날개가 펼쳐진 상태였다는 현장조사결과가 유력한 정황증거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조종사들에 따르면 랜딩기어나 보조날개는 통상 활주로 전방 6∼8마일에서 작동되며 사고당시처럼 악천후로 시계(視界)가 나쁠수록 일찍 내린다.
따라서 이보다는 착륙준비중인 저고도 항공기가 공항쪽을 바라볼때 VD 근처 경보등과 활주로접근등 초입부분의 불빛이 연속돼 있는 것처럼 보여 VD를 활주로 시작지점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당시 폭우가 쏟아졌던 사고지점 상공은 지형상 언덕을 구름으로 착각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조종사들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시나리오②:악천후〓폭우를 동반한 국지돌풍(Microburst)이 사고기를 내리눌러 사고를 낳았다는 가설로 사고당시 기상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나빴다는 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의 발표 이후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국지돌풍은 적란운이나 탑상적운(탑 모양의 검은 뭉게구름)이 형성되면서 직경 1마일 정도의 좁은 지역에서 갑자기 발생, 5∼10분만에 사라지는 하향강풍. 이 강풍이 지면에 부딪쳐 사방으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흩어지면서 항공기를 짓눌러 급강하시켰다는 것.
사고 10시간 전에 공항 남쪽 상공에서 깔때기구름이 관측됐으며 사고당시 공항주변 상공에 집중호우가 내렸다는 점이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 항공기는 국지돌풍 지역을 불과 수초안에 통과하므로 사고당시 기내가 평온을 유지했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은 이 가설을 배척할 수 없다.
▼시나리오③:고도계 이상〓관제사가 공항의 기압정보를 조종사에게 잘못 통보했거나 조종사가 고도계를 제대로 설정하지 않았다는 가설. 이 경우 조종사는 정상고도를 날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항공기는 엉뚱한 고도를 날게 된다.
항공기가 착륙하려면 공항 지상의 기압으로 고도계의 기준기압을 바꿔야 한다. 기준기압을 잘못 설정하면 1InHg당 1천피트씩 고도차이가 난다. 즉 실제 공항지상기압이 29.72InHg인데 고도계가 29.82로 설정됐다면 항공기는 조종사가 생각하는 고도보다 1백피트 낮게 날게 된다. 따라서 관제사나 조종사간의 무선교신에 문제가 있거나 조종사의 「손 실수」로 엉뚱한 기압치가 고도계에 입력돼 사고기가 최저안전고도 이하를 날다가 야산에 부딪쳤다는 것이 이 가설의 골자다.
이 가설은 『급강하를 느끼지 못했다』는 승객이나 승무원들의 한결같은 증언을 가장 상식적으로 설명해준다. 블랙박스 해독 결과 조종실이 평온을 유지했으며 『조종사가 기체를 완전장악했다』는 NTSB의 발표도 유력한 정황증거다.
기상전문가들은 괌공항 주변상공처럼 평소 기류변화가 심한 곳은 고도계가 제대로 입력됐다 하더라도 계기고도가 실제 비행고도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관제 등 기타요인〓관제사는 착륙허가를 내리기까지 조종사와 정상교신했다는 점에서 △MSAW의 비정상작동 △불명확한 이양관제 시스템 등이 과연 사고의 한 원인이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로서는 관제소홀이 사고의 직접원인이라고 볼 만한 사실 또는 정황증거가 없다.
GS 등 공항장비가 최악의 상황이었다는 점도 사고의 직접원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체결함의 개연성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이철용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