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영-안선국가족 회견]『北,식량난 악화 불만 고조』

  • 입력 1997년 5월 22일 11시 58분


지난 13일 서해를 통해 귀순한 金元瀅(57)安善國씨(46) 가족 14명은 22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귀순경위와 식량난등 북한의 실상에 대해 담담히 진술했다. 이들은 회견에 앞서 자신의 가족 소개를 한 뒤 선박을 이용해 북한을 탈출하면서 겪은 고초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의 실상 등을 묻는 질문에 차례로 답했다. -다소 여유있는 생활에도 불구하고 귀순하게 된 동기는. ▲金원형씨= 해외에 있는 동생과 어머니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생활에 그다지 어려움은 없이 그럭저럭 살았다. 그럼에도 북한을 탈출하게 된 것은 북한체제의 불합리성과 월남자 가족이라는 처지때문이었다. 특히 이전에 부모들이 잘 살았다는 신분때문에 북한에서는 항상 그늘밑에서 지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다 91년 동생이 미국에서 찾아와 회포를 풀면서 선물로 휴대용 라디오를 주고 간 뒤 남한방송을 많이 듣게 됐다. KBS 사회교육방송을 많이 청취하면서 남한의 실상을 알게 됐고 그 이전에도 동생과 어머니로부터도 남한의 발전상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남한에 대한 동경심이 생겼지만 당시는 조건이 허락치 않았다. 그후 지난 4월 동생의 자금지원과 협조를 통해 배를 구입한 뒤 안선국씨와 구체적인 탈출 계획을 짰다. 그것이 탈출의 시작이었다. --황장엽 前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실은 알고 있었는가. ▲金원형씨=라디오를 통해 남한 방송을 청취하면서 망명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대부분은 황비서의 탈출로 생각하지 않고 (한국이) 체포해갔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탈출 과정에서 중국 북경에 갔을 때 황비서의 망명으로 한참 복잡했었다.이로인해 중국 내부에서 탈북에 대한 경계가 심해져 탈출 작업도 보다 더 신중하게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安선국씨= 황비서 신병에 관한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은 북한 당국의 공식발표를 통해서였다. 지난달 8일께 조선노동당이 당원강령을 통해 황비서 탈출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그 이전에 황비서 신병과 관련해서는 일체 비공개였으나 중국이나 남한의 방송을 듣고 한입 두입을 거치면서 소식을 알고 있는 주민도 꽤 있었다. 제대로 먹고 직위도 높은 황비서가 `뛸' 정도면 국가 체제에 큰 혼란이 있고 결국에는망하지 않겠느냐 하는 일부 여론도 있었다. 또 그같은 고위간부가 탈출하게 될 정도인데 직급 낮은 주민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해 불평불만이 야기되기도 했다. 노동당 강령을 통해 황비서 탈북에 대한 대책이 논의됐다. 식량난과 수해를 겪은 뒤 `붉은기 혁명 정신으로 살아나가자'는 2차례의 `고난의 행군' 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김일성의 과거 교시에서도 `비겁한자여 갈테면 가라. 우리는 붉은기를 지키겠다'는 붉은기 정신 교육이 있었다. 이에따라 황비서는 이 붉은기 정신과수령을 배신한 자이며 북한 탈출은 망령된 노릇으로 평가됐다. --對北지원 식량이 주민들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데. ▲金희성씨= 일반 주민들은 미국 한국에서 지원해준 식량이 군용으로 돌아가는데 왜 자꾸 식량을 보내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아예 안보내는 것이 낫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주민들은 △수해난에 따른 순수한 지원 △김정일과 북한의 군사력에대한 두려움 △북한의 불만을 잠재워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국 한국이 식량을 지원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 --탈출경로는 어떻게 되는가 ▲安선국씨=金씨의 동생인 金仁瀅씨로부터 자금을 받은 뒤 탈출 계획을 짰다.가족단위 또는 부부간에는 같이 배를 탈 수 없기 때문에 경비가 심한 평안북도 신의주 국경분소에서는 나와 金씨 가족 일부만을 태우고 경비가 다소 허술한 평안북도동천부두에서 나머지 가족들을 만나기로했다. 또 원형씨는 자동차에 나머지 가족을 태워 동천부두로 오기로 했으며 나는 이들이 길을 잘 모르기 때문에 부두로 오는 도로에 나가 이들을 마중, 배로 데리고 왔다. 8선 연장선상에 있는 해안은 북한 경비함들이 많이 몰려있기 때문에 이 곳을 통해서는 탈출할 수 없다고 판단, 일단 중국 산동성 공해지역으로 나갔다가 남한으로 선수를 돌려 귀순했다.공해상에서 기상이 악화되는 바람에 배가 파손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우리가 소지하고 있던 소형 반도체 라디오를 통해 인천 남부지역에 폭풍주의보가 내렸다는 것을 알고 배가 침몰해 죽는거나 북한 경비함에 잡혀 죽는거나 똑같다는 생각에 계속 배를 남한쪽으로 몰았다. 그러다가 다른 배가 보여 처음에는 북한 경비함일까 우려해 조난된 배로 가장하기 위해 해상지도와 나침반을 감췄다가 태극기를 보고 귀순의사를 밝혔다. --쌍둥이 동생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金원형씨=지난 90년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북한에 들어온 이모가 손윗형을 만나 어머니와 동생이 미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 동생과 모친의 생존사실을 알게됐다.미국에 살고 있는 동생과 어머니로 인해 특별히 불이익을 당한 적은 없다.그러나 북한사회에는 직장 등 사회 곳곳에 보이지 않는 경계망이 펼쳐져 있다. 손윗형은 사위가 군부에서 일하고 있는 데다 나와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탈북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탈북계획을 잘못 알렸다가는 우리 가족이 모두 죽음에 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최근 국경.해안지역 경계상황은. ▲94년말 평북 북부 해안 및 국경경비를 담당하던 보위부 5국(경비총국) 11여단의 임무를 해안경계 업무로 한정하고 국경지역 경계를 위해 7개 대대 규모의 31여단을 신설했다.96년초부터는 국경.해안초소에 초소장(중위) 외에 정치부초소장(소위)과 보위부초소장(소위)을 각각 추가 배치해 초소 근무자에 대한 감시 및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직접 겪은 가정의 식량난은. ▲북한가정은 3년전까지는 한달에 60㎏의 쌀을 배급받았으나 이후에는 식량을 거의 배급받지 못했으며 햇곡식이 나오는 9월이나 10월에 쌀 10㎏을 받았을 뿐이다. 우리집의 경우 10㎏으로는 다섯식구가 살기에 턱없이 모자랐다.이 때문에 우리집 식구 가운데서도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도 있고 실제 탈북직전 굶어죽는 주민도 2명을 직접 목격했다. --북한 영어교육의 실태는. ▲미국에 있는 삼촌한테 영어카세트와 교재,영어사전 등을 보내달라고 했었는데 카세트는 당국에 뺏기고 영영사전과 조영사전(영한사전)2권을 받았다. 그런데 조영사전의 경우 한국이라는 말은 모두 지워져 있었다. 북한에서는 외국출판물이 들어오는 것을 `흑색바람'이라고 하는데 이 바람을 막기위해 사상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영어교사들의 경우 대학교 1-2학년때는 나름대로 공부에 대한 열정이 있으나 고학년이 되면 `공부는 해서 뭐하나'하고 자포자기한다. 한 과에서 매년 준박사가 1-2명 배출되는데 준박사도 간단한 생활영어 한두마디만 할 줄 알지 제대로 영어를 하는 사람은 없다. 또 학생들의 경우도 학부모들이 배가 고픈데 무슨 공부냐며 학교에 보내지 않고 식량을 구하러 보내기 때문에 심할 경우 한 학급에서 50% 정도가 결석한다. 이 때문에 한 교사가 두 학급을 동시에 가르치는 경우도 허다하며 교사들도 식량 구하기에 나서느라 정신이 없다. --북한 주민은 金正日체제를 어떻게 생각하나 ▲金희근씨=지난 80년 이후부터 식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불평이 고조되기 시작했다.최근에는 식량난이 더 악화돼 이러한 불평.불만 분위기가 더 심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이같은 불평을 털어놓다가 붙잡혀 다시 나올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최근에는 金正日이 자리에서 물러나든지 아니면 쌀을 주든지 해야 될꺼 아니냐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 --식량난으로 인육을 먹기도 한다는데 사실은 어떤가 ▲安善國씨=사람을 잡아 먹었다거나 돈을 빼앗기위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그러나 내가 직접 이것을 본적은 없고 또 이러한 일로 공개처형을 당하는 것을 본적도 없다.설마 사람까지 잡아 먹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체제불만이 직접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게 있는가 ▲金희근씨=정치적으로 어떤 특별한 행동이 있는 것은 아니다.단지 돈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전화.전기선을 1㎜라도 짜르려고 한다.오늘 총살당하는 것을 보더라도 내일이면 다시 전기 전화선을 끊으려고 한다. --식량난으로 산모들이 사산이나 조산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金순희씨=상급병원이나 하급병원이나 약과 시설등이 부족해 대부분의 산모들이 집에서 아기를 놓으려고 한다.사산보다는 미숙아가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지난 94년까지는 시장에 나가는 것을 흉칙한 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그러나 최근에는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어린 학생들이 시장에 나가는 것도 흉칙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개인들이 신발 등을 스스로 만들어 시장에 나가 양식을 구한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은 중국상품이 가장 많고 이외에 집에서 만들어 나오는 것이 있다. 그러나 공장에서 나오는 것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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