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회의, 회의…일은 언제 하는 거죠?[주성하의 북카페]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5일 14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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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가는 기업의 공통점은 쓸 데 없는 회의가 많아지고, 사장만 열심히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또한 임원들은 책임을 회피하며 뭔가 추진하다가 실패하면 희생양을 찾기에 급급하죠.

북한을 들여다보면 자금난에 빠져 망해가는 기업들을 꼭 빼닮은 징조들이 두드러집니다. 물론 원래 그랬지만 올해는 더욱 심합니다.

올 들어 두 달이 이미 지나고 3월 첫째 주도 지나가고 있지만, 북한은 아직도 중앙과 지방 할 것 없이 회의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중앙에서는 1월 5일 8차 노동당대회를 열고 14일 열병식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열흘 동안 북한 주요 간부들이 묶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17일 최고인민회의가 열려 내각의 많은 간부들이 교체됐습니다.

당 대회와 최고인민회의가 끝난 뒤 북한 각 조직에선 노동당대회에서 채택된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회의가 1월 말까지 이어졌습니다.

북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1월 말에 북한의 모든 직장인들은 오전마다 회의실에 모여 당대회 내용을 학습하고 자기 직장의 실정에 맞게 어떻게 계획을 세워야 할지 의논하느라 열흘 넘게 보냈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오전에 거리에 나가면 사람이 사는 곳인지 모를 정도로 한적했다 네요. 그런데 이런 회의에도 정장을 입고 참가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결혼식에도 잘 입고 가지 않는 양복을 찾아 입느라 분주했다고 합니다. 회의 복장까지 자잘하게 지침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비본질적인 곳에 에너지를 쏟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지루한 회의를 거쳐 각 기관의 경제목표 달성 과제가 채택이 되고, 이것이 종합돼 김정은에게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김정은이 8차 당대회에서 국가경제발전 5개년계획이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했다고 경제 실패를 자인하면서 이번에는 실현가능한 목표를 세우라고 했기 때문에 각 기관이 올려 보낸 목표는 나름 실현가능한 최대치를 담느라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2월 초에 김정은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8일부터 11일까지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간부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연말에 비판을 받지 않을 정도로 낮추어 기안하는 편향을 범했다”는 겁니다. 가령 “전력생산계획을 현재의 전력생산 수준보다 낮게 세웠다”느니, “평양시 살림집 건설계획을 당대회에서 결정한 목표보다 낮게 세웠다”느니, “신발 생산계획을 형편없이 낮게 세웠다”느니 하면서 간부들의 소극성과 보신주의를 질타한 것입니다.

김정은은 “계획을 낮게 세워놓고 연말에 가서 초과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으려고 하지 말고 실제 경제 건설과 인민 생활에 기여할 수 있게 발전 지향성과 역동성, 견인성, 과학성이 보장된 목표들을 제기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북한 각 공장, 기업소들의 계획서를 취합해 보고한 김두일 당 경제부장은 해임됐습니다.

간부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 전에는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우라고 하더니, 이제는 목표가 낮다고 또 뭐라고 하니 말입니다.

어느 기준이 김정은이 만족할 만한 기준인지 간부들이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김정은은 2월 24일 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 25일 내각 전원회의 확대회의까지 직접 주재하며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고위 간부들이 김정은 앞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는 사이 북한 주민들이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시 북한 전역에서 지루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김정은이 ‘보신과 패배주의’를 언급하며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각 직장에선 1월말에 했던 회의에 대해 비판하고 반성하면서 “우리가 보신과 패배주의에 빠져 장군님께 심려를 끼쳐드렸다”고 자책하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러면서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높은 경제 정책 과제를 달성하겠다”고 각오를 다지느라 2월이 또 다 지나갔습니다.

이런 회의들을 가진 뒤 이번엔 궐기 모임이 북한 전역에서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2월 28일 황해제철연합기업소(황철) 노동계급이 당대회 결정 관철을 위한 호소문을 전국에 발표한 뒤 북한 각 부문에서 이에 호응하는 궐기 모임이 3월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물론 황철 노동계급이 보냈다는 호소문은 그들이 자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중앙당에서 그 기업을 찍어 지시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황철 노동자들은 아침 일찍 나오라는 대로 나와 추위에 떨며 기다리다가 단상에서 여러 간부가 호소문, 맹세문, 결의문 등등을 교대로 몇 시간 낭독하면 중간에 구호들을 외치는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그 구호도 대열 앞 방송차에서 “관철하자”는 구호가 나오면 주먹을 높이 들며 “관철하자”를 세 번 외치면 됩니다.

황철에서 이런 행사가 끝난 뒤 노동신문은 기다렸다는 듯 “당이 제시한 5개년 계획의 첫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전인민적인 총공격전, 총결사전으로 부른 황철 노동계급의 심장의 호소는 전체 근로자들의 혁명적 열정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투쟁 의지를 비상히 격양시키고 있다”면서 “영웅적 노동계급의 절대불변의 신념이 응축된 황철의 호소 따라 온 나라가 일시에 들고 일어났다”라고 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바람에 3월 첫째 주에 북한 주민들은 궐기 모임을 갖느라 분주하게 모였습니다. 노동신문은 내각사무국, 재령광산, 화학공업성, 전력공업성, 북창화력발전련합기업소, 석탄공업성 등등 모든 부문에서 궐기 모임이 열렸다고 전했습니다. 사실 앞에 언급한 부문들은 극히 일부고 실제 노동신문에 실린 기관들의 이름은 숨이 가빠 다 읽을 수도 없습니다.

이제 두 달 동안 당 대회 정신 학습과 목표 달성을 위한 계획회의, 다시 반성과 계획 재수정 회의, 그리고 각오를 다지는 궐기 모임까지 마쳤으니 일을 좀 시작하면 될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정은은 다시 회의를 열었습니다.

3월 3일부터 김정은의 참석한 가운데 시·군 당책임비서 강습회가 평양에서 열렸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시장이나 군수와 맞먹는 해당 지역에서 제일 높은 간부입니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강습회는 노동당 역사에서 처음이라고 합니다. 가뜩이나 회의 종류가 다양한 북한에서 없던 회의 종류가 또 만들어졌습니다. 노동신문은 “강습회가 당의 시·군당 조직들의 기능과 역할을 높여 당의 전투력을 다지고 지방 경제와 인민 생활을 발전·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라고 의의를 부여했습니다.

강습회에선 김정은이 개강사를 했다고 합니다. 개강사라는 연설도 아마 북한 역사에서 처음 나오는 연설 종류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지방의 주요 당 간부들이 김정은의 개강사까지 들었으니 근로자들은 또 회의하기에 바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간부들이 내려와 중간 간부들을 모아놓고 김정은의 의도를 전달하면 중간 간부들은 다시 근로자들을 모아 놓고 학습을 시킬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군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뜻을 인민들에게 전달하지 않는 심각한 반당반혁명 행위를 저질렀다”며 간부들이 숙청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나온 ‘황철의 호소’는 유효 기간이 얼마나 될까요.

이미 저런 수법은 김일성 때부터 닳고 닳을 정도로 써먹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에 직면하자 김정은은 지금처럼 자력갱생(自力更生), 간고분투를 외치며 온갖 지명을 가져다 무슨 정신을 창조하느라 바빴습니다. 당시에 자강도 정신, 희천 정신, 라남 정신 이런 식으로 몇 년 동안 북한의 지명들을 한 바퀴 돌면서 계속 정신만 만들어내다가 흐지부지됐습니다.

앞으로도 ‘황철의 호소’ ‘대안의 호소’ ‘나남의 호소’ 이런 것들이 계속 쏟아져 나올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인민들은 궐기 대회를 열심히 열어야 합니다.

강습회가 끝나면 이제 회의는 더 하지 않아도 될까요. 누구도 알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3월 중순까지 회의만 저렇게 지겹게 하게 되면 도대체 일은 언제 하는 건지 궁금해집니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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