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물은 약해 보여도 강해”… 대선출마 여부엔 침묵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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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특파원들과 예정없던 간담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가운데)이 22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뉴욕특파원단 송년 만찬 행사에 참석해 간담회를 가졌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가운데)이 22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뉴욕특파원단 송년 만찬 행사에 참석해 간담회를 가졌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71)이 사실상 ‘한국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반 총장은 22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의 오준 유엔 주재 한국대표부 대사 관저에서 열린 뉴욕특파원단 송년 만찬 행사에 참석해 예정에 없던 간담회를 1시간 넘게 가졌다. 내년 4·13 총선을 앞두고 안철수 의원의 탈당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이 오합지졸(烏合之卒) 양상을 보이고 새누리당도 친박(親朴) 진박(眞朴) 논란에 휩싸인 상황이어서 반 총장의 예고에 없던 즉석 간담회가 주목을 끌고 있다.

반 총장은 이른바 ‘반기문 대망론’이 여야 정치권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지난해 11월 초 “국내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성명을 냈다. 이후엔 한국 언론과의 접촉을 일절 피해 왔다. 같은 해 12월 특파원단 송년 모임에도 “무슨 말을 해도 정치적으로 해석될 것 아니냐”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국내 정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특파원 송년회에 참석한 게 아니냐는 뒷말을 낳았다.

근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반 총장은 특파원단 간담회에 나타나 정치 행보로 해석될 만한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이를 두고 ‘반기문 대망론 때문에 유엔 사무총장 업무에 방해가 될 수 있다’며 스스로 선택했던 ‘정치적 연금(軟禁)’을 해제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 ‘물(水)의 정치’론

반 총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보좌진들이 오늘도 (참석하지 말라고) 나를 말렸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분(한국 언론)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먼저 기자들이 “반 총장이 차기 대선에 출마한다는 건지, 명백한 입장을 밝힐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한마디도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 총장은 이날 처음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8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단독 회담을 할 때 ‘상선약수(上善若水·지극히 착한 것은 마치 물과 같다)’란 휘호를 선물한 이유에 대해 반 총장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내가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의전수석비서관을 했다. 딱딱했던 청와대 의전을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최고 덕목은 물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물은 가장 약해 보인다. ‘사람을 물로 보지 마라’ 같은 표현도 있다. 그러나 물은 정말 중요하다. 불이 제일 강한 것 같지만 물을 못 이긴다. 쇠도 결국 물에 못 당한다. 물은 절대로 힘을 안 쓴다. 멈추지도 않는다. 물이 멈추면 썩는다. 그건 곧 거버넌스(governance·통치)가 안 된다는 의미다. 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 엄청 강하다. 홍수나 쓰나미가 났을 때 물은 단단한 쇠도 구부리고, 큰 나무도 쓰러뜨린다. 나는 상선약수에 대한 신념이 강하다. 모든 것을 부드럽게 하지만, 힘을 쓸 때는 확실하게 쓴다.”

이어 반 총장은 “내가 조용한 것 같지만 강하게 해야 할 때는 강하게 밀어붙인다. 기후변화 문제든, 난민 같은 인권 이슈든 회원국 정상들과 싸워야 할 때는 강하게 싸운다. (나 말고) 누가 국가 정상들과 그런 이슈로 싸우겠느냐”고 힘주어 말했다.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도 지리멸렬한 마당에 반 총장이 완곡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 “사무총장으로 해야 할 일은 거의 다 했다”

반 총장은 이날 간담회 내내 여유 있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질문에 바로 “그렇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유엔 소식통들은 “프랑스 파리의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서 역사적인 ‘파리 기후협정’이 최종 타결된 것이 반 총장의 자신감을 한층 끌어올렸다”고 풀이했다. 반 총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새천년개발목표(MDG)의 마무리, 그것을 대체하는 지속가능개발목표(SDG) 채택, 기후협정 타결 등 10년 임기 동안 목표했던 일들을 (임기 9년째인) 올해 대부분 다 이뤘다”고 말했다.

유엔 안팎에선 “반 총장이 추진 중인 평양 방문만 성과를 내면 내년 말 ‘노벨 평화상’의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될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반기문 대망론’이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탄력을 받게 할 호재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날 ‘예고 없는’ 간담회에서 한 그의 ‘상선약수’ 발언은 의도를 했든, 하지 않았든 정치권에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반기문#대선#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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